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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공근

安恭根

1889. 7. 11 ~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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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안공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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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신천(信川)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신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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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한국독립당
  • · 한인애국단
  • · 한국국민당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889년 7월 11일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 청계리(淸溪里, 현 청계동)에서 안태훈(安泰勳)과 조(趙)마리아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호는 신암(信庵)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요한이다. 이명으로 서이로(西利潞)·안삼재(安三才)·조한용(趙漢用)·장진구(張震球) 등을 사용하였다. 큰 형은 안중근(安重根), 둘째 형은 안정근(安定根)이다. 고려 말 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예이며 대대로 황해 해주에 세거하였던 향반(鄕班) 계층으로, 안태훈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의 화를 피해 1885년 산골인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1898년 4월 집안 식구들과 빌렘(Nicolas J. M. Wihelm, 한국명 : 洪錫九)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이후 1906년 가족과 평남 진남포(鎭南浦)로 이사하여, 형 안중근이 세운 삼흥학교(三興學校)에 다녔다. 1907년 서울로 올라와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였고, 1909년 8월 진남포에 있는 공립보통학교에 부훈도(副訓導)로 부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직후, 어머니와 둘째 형, 진남포 세관 주사 김문규(金文奎) 등과 진남포경찰서에 붙잡혔다가 풀려났지만, 이 일의 여파로 보통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1909년 12월 13일 안정근과 함께 뤼순(旅順)으로 가서 미조부치 요시오(溝淵孝雄) 검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안중근을 면회하였다. 1910년 3월 25일 마지막으로 큰 형 안중근을 면회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뤼순에 머물며, 일제가 한국인 변호사를 초청하는 전보를 압수한 일, 한국인 변호사 안병찬(安炳瓚)이 도착하였으나 면회를 허락하지 않은 일, 공판정에서 검사가 거짓 논고를 한 일 등에 대해 안정근과 항의하였다. “이때 만약 두 동생과 안병찬이 가지 않았다면 안중근이 아무리 항변하였어도 그들은 기필코 안중근이 굴복하였다는 말을 날조하여 세인들의 이목을 덮어 감추었을 것이다”라는 박은식(朴殷植)의 언급이 이때의 활동을 대변해주고 있다. 1910년 5월경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그 해 10월 안중근의 활동근거지였던 크라스키노(煙秋)로 가서 엄인섭(嚴仁燮)과 최재형(崔才亨)의 집에 머물렀다. 크라스키노는 안중근이 단지동맹(斷指同盟)을 조직하였던 곳이고, 안중근유족구제공동회가 결성되어 있었다. 일제 경찰의 수색과 추적이 이곳까지 미치자, 1911년 4월 안창호(安昌浩)의 주선으로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링(穆陵)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1912년 6월 무링을 떠나 모스크바(Moscow)에서 유학을 하였고, 1914년 둘째 형 안정근이 있던 연해주의 니콜리스크(蘇王嶺)로 돌아왔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일제가 러시아 당국에 한인지도자들의 추방을 요구하면서 추방대상자로 지목되어, 하얼빈(哈爾濱) 등 여러 곳으로 피해 다녔다. 1915년경 안정근과 국적을 러시아로 바꾸고 귀화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1917년 7월 무링에 있는 가족들을 니콜스크로 이주시켰다. 니콜스크에서 안정근과 벼농사를 시험하여 1919년에 성공을 거두었다. 벼농사를 확대하기 위해 러시아 당국과 토지조차를 교섭하던 중,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름을 받았다. 1920년 5월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임시정부에서 러시아에 파견할 특사로 선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大韓民國 臨時議政院)에서 황해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이어 임시정부에서 부임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1921년 4월 새로 내각을 구성할 때 외무차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7월 29일 외무총장 이희경(李喜儆)과 함께 임시정부 특사로서 러시아로 떠났다. 한형권(韓馨權)을 소환하고 이들을 파견한 것이다. 10월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정부에 독립자금 지원을 요구하였으나, 이미 한형권에게 지급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25년 11월 당시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이 사망할 때, 그의 유언을 받아 적었다. 이후 안정근이 병을 얻어 가족을 데리고 웨이하이(威海衛)로 요양을 떠난 뒤에는 모친 조마리아와 큰형 안중근의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상하이에 있는 미국·영국·소련 영사관 등에서 일하였다. 1926년 상하이를 중심으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자는 운동이 일어나자, 1926년 5월 조상섭(趙尙燮)·오영선(吳永善) 등과 독립운동촉성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1927년 4월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좌우익 세력들이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를 결성할 때, 홍진(洪震)·이동녕(李東寧) 등과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1928년 3월 유기석(柳基石)·이을규(李乙奎) 등 아나키스트들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을 무렵, 조카 안원생(安原生)을 비롯한 청년들과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 팔인단(八人團)을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유일당운동이 결렬된 후, 1930년 1월 25일 이동녕·안창호·조소앙(趙素昻)·김구(金九)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할 때 당의 주의(主義)와 정강(政綱) 기초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이사에 선임되었다. 이와 더불어 ‘민중적 반일운동과 무력적 파괴’를 채택하고, 그 책임을 김구에게 맡겼는데, 김구와 함께 이를 추진 실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1931년 11월 김구와 함께 일제 주요 요인을 암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였고, 단장 김구를 도우며 참모 역할을 맡았다. 이때 단원 모집과 관리·연락·활동 등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고, 패륵로(貝勒路) 신천상리(新天祥里) 20호의 자택을 한인애국단 본부로 삼았다.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李奉昌)의 선서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고, 다롄(大連)과 국내로 파견된 단원들과의 통신연락처도 이곳이었다. 유창하게 구사하는 러시아어를 배경으로 프랑스 공무국의 정보담당관인 러시아인을 통해 일본영사관 등에서 많은 정보를 수집하였고, 한인 밀정들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김구의 핵심 측근이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거 후, 김구가 자싱(嘉興)으로 피신할 때 한인애국단에 관한 일을 부탁받았다. 1933년 1월 김구·엄항섭(嚴恒燮)·박찬익(朴贊翊)과 함께 한국독립당 이사에서 해임되었다. 한인애국단을 운영하면서 임시정부와 관련 없이 독자적인 행보를 하게 된 것이 이유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과는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았고, 김구가 이끄는 조직을 관리하였다. 또 아나키스트 항일운동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연계를 맺고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3년 8월 1일 옥관빈(玉觀彬) 처단을 주도하였으며, 1935년 3월에는 아나키스트 엄순봉(嚴舜奉)에 조선인거류민회 고문 이용로(李容魯) 처단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1934년 2월 김구가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을 편성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게 되자, 학생보호계(學生保護系)로 입교생 모집에서부터 학생 운영과 관리를 맡았다. 또 1934년 6월부터 박찬익을 대신하여 중국정부와의 교섭과 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김구가 자금관리 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박찬익을 교체하고, 그 업무를 맡도록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구의 핵심 측근으로서 확고한 위상을 확보하였다. 1934년 12월 난징(南京)의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과 학생훈련소에서 김구의 대리인 역할도 하였다. 특무대독립군은 뤄양군관학교에서 철수한 김구 계열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였으며, 학생훈련소에서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시킬 청년들을 수용하여 예비교육을 실시하였다. 1935년 11월 김구와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고 이사를 맡았다. 이로써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의 무정부 상태도 수습되었다. 1936년 7월 한국국민당의 전위조직으로 한국국민당청년단과 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하고 관리하였다. 두 조직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한국국민당의 세력을 확대해갔다. 이후 1937년 7월 15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군사위원회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가 전시체제 대비와 군사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한 기구였다. 이 무렵부터 김구와의 관계가 멀어져 갔다. 김구의 조직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그의 전횡 문제가 대두된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 한국국민당의 청년단과 전위단에서 활동하던 단원들이 불만을 품고 이탈하거나 별도로 맹혈단(盟血團)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했을 때, 안중근의 부인을 모시고 나오지 못한 것도 김구와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오자 자신의 가족도 내버려둔 채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郭樂園)만 난징으로 모시고 나왔다. 김구는 다시 상하이로 들어가 가족과 안중근의 부인을 모셔오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만 데리고 빠져나왔고, 안중근의 부인은 모시고 오지 못하였다. 이에 김구는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하였고, 이 일로 인해 김구의 신망을 잃게 되었다. 이후 가족들을 충칭(重慶)으로 이주시키고 홍콩(香港)으로 갔다. 상하이에 침투하여 안중근의 부인을 모셔오기 위해서였으나 다시 상하이에 들어갈 수 없었다. 홍콩에서 충칭으로 온 직후인 1939년 5월 30일 행방불명되었는데, 그 이유나 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로 확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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