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用桓
用桓1904. 10. 14 ~ 1943. 12.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예수교장로회
- · 구례읍교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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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4년 10월 14일 전라남도 광양군(光陽郡) 진월면(津月面) 오사리(烏沙里)에서 아버지 양재훈(梁宰勛)과 어머니 정정랑(鄭丁浪)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어려서는 양용군(梁容君)으로 불리다가 양용근(梁龍根 또는 梁用根)·양복근(梁馥根)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주로 양용근(梁龍根)이라는 이명을 썼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양천정일(梁川正一)을 썼다. 1942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붙잡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1920년 광양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순천 매산학교(順天 梅山學校, 현 순천매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22년 2학년을 마치고 일본에 건너갔다. 그곳에서 독학으로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중 1923년 9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을 만났다. 대지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과 군경에 의하여 재일조선인을 대상으로 벌어진 무차별적인 대량학살을 일본인이 간신히 피하였다. 1925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률과에 입학하였으며, 같은 해 4월부터 도쿄(東京)시청 토목국 고용원으로 근무하면서 고학하여 1930년 3월 니혼대학을 졸업하였다. 1930년 4월 귀국하여 고향인 오사리에 오사육영학원(烏沙育英學員, 현 폐교된 진월중앙초등학교 전신)을 설립하여 한글과 성경 및 보통교육 과정을 교육하였다. 같은 해 11월 오사육영학원을 인가받기 위하여 면장의 권고로 진월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였다. 1931년 3월 면서기를 사임하고 1934년 목회자가 되기 위해 평양(平壤)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6년 광양읍교회, 1937년 신풍교회(구 애양원(愛養園)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으며, 1938년 4월에는 순천노회에서 여수 신풍교회·구곡교회·덕양교회 세 교회의 전도사로 파송받았다. 1939년 3월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4월 1일부터 고흥군(高興郡) 길두교회를 담임하였으며, 같은 해 5월 나덕환(羅德煥)·안덕윤(安德胤)과 함께 순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길두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면서 교인들에게 기독교 계명 준수와 말세 신앙을 설교하고, 특히 1940년 2월 고흥군 포두면(浦頭面) 송산리교회(松山里敎會)에서 개최된 고흥연합사경회(高興聯合査經會)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설교를 하여 신사참배와 황민화를 강요하던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이 일로 고흥경찰서에서 내사를 받자, 비밀리에 이름을 양복근(梁馥根)으로 개명하고 김상두(金相斗) 목사와 연락하여 1940년 4월 구례군(求禮郡) 구례읍(求禮邑)교회로 전임하였다. 그러나 1940년 9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전국에 이른바 ‘조선기독교도 불온분자 일제 검거령’이 내려지자, 일제 경찰이 11월 15일 순천중앙교회 박용희(朴容羲) 목사를 비롯한 순천노회원을 검거할 때 함께 붙잡혀서 구속되었다.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으면서도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여 고문과 가혹 행위를 받고 1943년 12월 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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