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鳳榮
鳳榮1897. 11. 27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적십자회
- · 독립신문사
- · 조선일보사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철산군 철산읍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7년 (음)11월 27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철산면(鐵山面) 동부동(東部洞) 에서 아버지 유학요(劉學堯)와 어머니 하동 권씨(河東權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원봉(圓峰)이다. 법호(法號)는 안산(安山)이고 법명은 청원(靑園)이다. 부유한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7년 고향의 신명학교(新明學校)에 입학하였다. 1910년 6월 졸업하고, 그 해 9월 박천군(博川郡) 소재 육영학교(育英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중퇴하였다. 1915년 4월 서울 기독교청년회학관 영어과에 입학하였으나 역시 같은 해 겨울 중퇴하였다. 1916년 6월 철산읍 소재 명흥학교(明興學校)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철산읍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명흥학교 교장 심치규(沈致珪), 같은 학교 교원 안태영(安泰英) 등 동지들과 함께 자신의 사랑방에서 3~4차에 걸쳐 비밀회의를 개최하고 거사 날짜를 3월 7일 철산읍내 장날로 결정하였다. 거사 당일 정오 예수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 행진을 하던 중 일제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 9명과 부상자 30여 명이 발생하였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피신하여 선우혁(鮮于爀) 등에게 국내 상황을 보고하였으며, 만주로 가서 같은 해 7월까지 펑톈(奉天)에 머물며 지린(吉林)·서간도(西間島) 등지의 교포를 방문하고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그 해 8월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서 1920년 1월까지 체재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고향의 토지를 매각하여 이희경(李喜儆) 등과 대한적십자회를 창립하고 활동 자금으로 제공하였고, 독립신문사의 인쇄 기계 구입비용을 제공하였다. 다시 펑톈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21년 3월 서울을 거쳐 4월 일본 도쿄(東京)에 건너가서 10월까지 체재하였다. 같은 해 10월 말 펑톈으로 가다가 경상북도경찰부에 붙잡혀 40일간 대구경찰서에 갇혔다가 철산으로 압송된 후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요시찰(要視察)’ 인물로 분류되어 여러 차례 일제 경찰에 체포, 구금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925년 4월 서울로 이주하였고, 1936년 10월 조선일보사에 기자로 입사하여 1940년 10월 폐간될 때까지 민족문화 창달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기사를 다수 게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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