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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연

安成連

1888. 8. 22 ~ 1949.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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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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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丹陽)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단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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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5) 1888년 8월 22일 충청북도 단양군(丹陽郡) 북면(北面) 용정리(龍井里)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에는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 상동(上洞)에 거주하면서, 짐을 나르는 품팔이꾼으로 생활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만세시위는 독립운동의 주요한 방식이 되었다. 1주년이 되는 1920년에도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1920년에는 일제가 한국의 식민통치를 선전하기 위해 미국의 국회의원들을 초청하기도 하였다. 이때를 계기로 원산에서는 김장석(金章錫)·김상익(金相翊) 등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는데, 여기에 참여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김장석은 김상익·조병철(趙秉喆)·김병륜(金秉綸)·이용구(李容九)·이용훤(李容暄) 등과 향후 계획을 협의한 후 역할 분담을 하였다. 같은 해 8월 21일 김장석은 동지들과 김상익의 집에 모여 미국 국회의원단에게 보낼 환영문을 작성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 국회의원단 환영, 일제의 가혹한 통치 폭로, 미국 의원단의 현명한 판단과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거사일을 9월 23일로 정하였다. 김상익은 이 문건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와 각계 요로에 전달하고, 나머지 동지들은 만세시위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김상익은 임무를 완수한 후 9월 23일 원산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원산의 만세시위 준비는 진전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제 경찰의 감시가 심하여 동지 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20년 9월 23일 저녁, 원산의 남산교(南山橋) 아래에서 산책 중이던 최종빈(崔鍾濱)·최종현(崔鍾炫)·이용구 등이 우발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쳤고, 삽시간에 남산교 일대는 독립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원산청년회관에 있던 김장석·김상익은 남산교의 함성을 듣고 동지들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여기에 원산보광학교(元山保光學校)와 원산공립보통학교 학생 600여 명이 가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조선식산은행 원산지점, 동양척식주식회사 원산지점, 원산 우체국 및 파출소 등 일제 기관을 습격하였다. 또 조권철(趙權喆)·강동근(姜東根)과 함께 철도길 부근에서 시위군중을 이끌고 평소 한국인을 무시하고 학대했던 일본인의 가옥과 상점에 돌을 던졌다. 이어 시위대는 원산 시내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일제 경찰의 무력탄압으로 현장에서 2명이 사망하였고, 주도자 약 50명이 붙잡혔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원산경찰서에서 58일간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되어 1920년 12월 23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1년 2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원산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2년 8월 23일 만기를 채우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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