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昶來
朴昶1885. 3. 3 ~ 1959. 9.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의민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중국 옌지현(延吉縣) 룽징(龍井) 만세운동
- · 옌지현 팔도구시장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1885년 3월 3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 현 논산시) 양촌면(陽村面) 양촌리(陽村里)에서 아버지 박인석(朴仁錫)과 어머니 김일래(金日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907년 전라북도 전주(全州)의 신흥중학(新興中學)을 졸업하였다. 1911년 간도로 이주하여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상의사(尙儀社) 태평구(太平溝) 석문촌(石門村)에서 석문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태평구와 팔도구(八道溝) 주민들을 이끌고 3월 13일 룽징(龍井)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사립 동성학교(東成學校) 교사로 재직하던 1920년 3월 1일에는 학생 15명과 팔도구의 학생·주민 70여 명을 인솔하여 팔도구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1920년 4월 북간도 왕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 알아하(嘎牙河)에서 천주교 세력과 항일의병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대한의민단(大韓義民團)에 참여하였다. 이때 옌지현 차조구(茶條溝)에서 방우룡(方雨龍) 등과 천주교 신자 3,000여 명을 망라하고, 조선 거주 신도들을 규합하여 대한의민단(大韓義民團)이란 비밀결사를 창설했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재류(在留) 금지’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5월 말 박영철(朴英哲)·김동규(金東奎)·심창순(沈昌順) 등과 차조구를 출발해 모록구(母鹿溝)로 가서 안형률(安亨律) 등 주민들에게 군자금을 요구하는 문서를 발송하였다. 그리고 비암동(飛岩洞)의 엄회장(嚴會長) 집에서 김석범(金錫範)으로부터 50원, 조권실(趙權實)로부터 20원 등 수백 원의 군자금과 물품을 거두었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었고, 1920년 10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북간도로 돌아가 1928년 1월부터 1936년 4월까지 천주교 소속의 해성학교(海星學校) 교사로 재직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그만두고, 천주교당에서 잡일을 하거나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광복 이후 1946년 4월부터 9월까지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자무쓰시(佳木斯市) 조선족 고려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