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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交倓

交倓

1880. 8. 19 ~ 1936.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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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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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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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신민회
  • · 공립협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9)

관련 사건

  • · 국채보상운동
  • · 이완용 처단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9) 1880년 8월 19일 서울 청진동(淸進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이교담(李交淡)을 사용하였다. 1903년 노동 이민에 지원해 미국 하와이(Hawaii) 호놀룰루(Honolulu)로 건너가 와이알루아(Waialua)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다. 그러던 중 기독교 감리교 교회에서 임치정(林蚩正)을 만나 친교를 맺고 같은 해 8월 홍승하(洪承夏)·윤병구(尹炳求)·임치정·안정수(安定洙)·박윤섭(朴允燮)·문홍석(文鴻錫)·임형주(林炯住)·김정국과 함께 발기하여 구국 정신의 고취와 항일 운동을 목적으로 미주 최초의 한인 정치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였다. 이때 이재명(李在明)과도 친교를 맺었다. 신민회는 홍승하를 회장으로 하고, 동족단결·민지계발·국정쇄신을 목적으로 활동하며, 1903년 12월에는 하와이 카우아이(Kauai)와 카파Kapaa 지방에 지회를 설립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하와이 한인 간의 종교적 분파와 정치인식의 차이로 갈등을 보이다가 1904년 4월 20일 해체되었다. 이후 임치정과 함께 190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이주하여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였던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일제의 한국 침략이 노골화되고 재미 한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고 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05년 4월 안창호·송석준(宋錫俊)·임준기(林俊基)·이강(李剛)·방화중(邦化重) 등 49인의 발기로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는데 참여하였고, 서기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공립협회는 미주지역에서 항일운동과 동족상애를 목적으로 활동하였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본격적인 민족운동 노선으로 전환하여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창간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 신문의 인쇄인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국내에서 대대적인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임치정·김성무(金成武) 등과 함께 미주 한인을 대상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고자 같은 해 3월 25일 공립신보사 사내에 의연금 총회소를 설치하여 국채 보상 운동을 미주 한인사회에 확장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이에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등 미국 각지에서 공립신보사로 의연금이 답지하였고, 의연금 출연자의 명단을 『공립신보』에 게재하고, 그 돈은 은행에 임치하였다가 수합되면 국내로 보냈다. 1908년 1월 미주 공립협회의 국내 활동과 조직 강화를 위해 국내로 파견되었다. 1907년 10월 미리 귀국해 있던 임치정이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에 입사하여 부총무 겸 회계주임으로 근무하며 대한매일신보사를 거점으로 공립협회와 연락을 취하면서 양기탁(梁起鐸) 등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 국내에 신민회를 결성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매일신보사에 인쇄인으로 합류하여 신민회에 가입,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의병전쟁의 쇠퇴 이후에는 안창호·임치정·김성무 등 신민회 회원들과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논의를 하였고, 1909년 11월 미국 공립협회 활동 시기부터 잘 알고 있던 이재명이 중심이 된 권장회(權獎會) 회원들과 함께 이완용(李完用) 등 매국노를 처단하려는 의거를 도왔다.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이 명동성당(明洞聖堂)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총리대신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명동성당 앞에서 기다리다가 성당을 나오는 이완용을 처단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의거를 위해 12월 12일 김태선(金泰善)에게 전달받은 7연발 단총을 서울 간동(諫洞, 현 종로구 사간동) 집안에 숨겨놓았다가 이재명에게 전달해 주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는 “김병록(金丙錄)이 하루는 이교담의 집에 가서, 그가 권총과 단도를 물동이 가운데에 감추어 두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의거로 이재명 등과 함께 관련자들이 붙잡혔다. 이때 이재명은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양한묵(梁漢默)·임치정·안태국(安泰國)·정의도(丁義道)·송종원(宋鍾遠) 등 신민회원 13명과 함께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해외로 망명하여 중국의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윈난(雲南) 각지와 남양군도(南洋群島) 등을 10여 년간 떠돌다가 1919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 1936년 4월 3일 서울 삼청동(三淸洞)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조선일보』는 「언론계의 선배 이교담씨 장서」라는 제목으로 “기미 후에 귀국해 가지고는 이래 가난과 병고와 싸우면서 만년에 고절을 지켜나려온 터이라 한다”라고 하며 죽음을 애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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