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觀求
觀求1885. 4. 29 ~ 1953. 3. 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광복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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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85년 (음)4월 29일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하리면(下里面) 안농리(安農里)의 전통 유학자 집안에서 아버지 이윤규(李允珪)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호(號)는 화사(華史)이다. 이명으로 종석(鍾錫)·해량(海量)·자선(子鮮)·충장(忠將)·정충장군(精忠將軍) 등 많은 이름을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조부와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1900년 유인석(柳麟錫)의 제자가 되었다. 1905년 상경(上京)하여 박은식(朴殷植)·양기탁(梁起鐸) 등과 언론계에서 활동하다가 학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평양(平壤)의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졸업하고 숭실대학(崇實大學)에 입학하였다. 숭실대학 재학 중인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자퇴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1년 (음)3월 서간도(西間島)에서 이시영(李始榮)을 만나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였으나 자금 부족으로 일시 중지하였다. 이후 중국 난징(南京)의 상강실업학교(上江實業學校)를 거쳐 베이징(北京)의 후이원대학(匯文大學, 연경대학에 흡수)과 명륜대학(明倫大學)에서 수학하였고, 저장성(浙江省) 항저우부(杭州府) 군관학교(軍官學校) 속성과를 수료하였다. 1913년 7월 중국 국민당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타도하려고 추진한 제2차 혁명에 참가하였다. 중국의 베이징·난징·상하이(上海) 등지를 차례로 방문한 후 하와이에서 김성삼(金成三)·윤영국(尹永國)·오현주(吳顯周)·길진영(吉震永) 등과 독립운동방법을 논의하였다. 1913년 귀국하여 해주(海州)에 머무르면서 해주지방 청년들을 하와이에 밀항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행치 못하였다. 또한 황해도내 유림계(儒林界)의 이종규(李種奎)·오순구(吳淳九)·박순흥(朴淳興) 등과 항일투쟁을 계획하고 평안 지역 유림 윤헌(尹憲)·노승룡(盧承龍) 등과 거의를 도모하였다. 이에 조선총독과 동포들에게 보내는 항일격문을 작성·배포하였으나 실패하자 1914년 11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4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을 위하여 유생들을 규합하고 국내와 간도의 독립운동단체와 제휴해 조선총독 암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와 동시에 만주지역으로 망명한 박은식·이시영·신채호(申采浩)·허성산(許聖山)·윤자영(尹滋瑛)·한진교(韓鎭敎) 등과 연락을 취해 그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16년 박상진(朴尙鎭)의 주도로 1915년에 조직한 비밀결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대외업무를 맡는 한편, 황해도 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유림출신 인사들을 동회에 가입시키는 등 조직 확대에 노력을 기울였다. 1916년 (음)9월에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고향의 가재(家財)를 매각한 뒤 중국 안둥(安東, 지금의 단둥)에 미곡무역상 삼달양행(三達洋行), 창춘(長春)에 상원양행(尙元洋行)을 설립해 대한광복회의 거점으로 삼았다. 한편 상하이의 한진교와 독립운동에 대한 연락을 도모하였으며, 한국 각지의 부자들을 모아 흥부회(興富會)를 결성하여 남북만주에 상업기관·학교·회사·병원을 설립하고자 계획하기도 하였다. 1916년 6월부터 안둥에서 박상진을 비롯하여 성낙규(成樂奎)·조선환(曺善煥) 등과 함께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하였다. 이때 박상진으로부터 권총 2정을 받아 성낙규·조선환에게 건네주며 국내로 잠입시켰다. 성낙규·조선환은 같은 해 (음)8월 황해도 장연(長淵)의 거부 손병현(孫秉鉉)·최봉식(崔鳳植)·오찬근(吳讚根) 등의 가택을 파괴하고 들어가 권총을 발사하여 군자금 150원을 모집하여 간도의 동지들에게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 귀국한 박상진은 1916년 8월 서울에서 체류하던 중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으로 광복회 회원 다수와 함께 붙잡혀 10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1917년 겨울에는 직접 서울로 잠입하여 박상진이 파견한 광복회의 권성욱(權成旭)에게 권총을 건네주었다. 또한 대한광복회 황해도 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황해 지역 독립운동세력을 기반으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특히 유림출신 인사들을 동회에 가입시키고 황해도 일대에서 광복회 회원 오찬근(吳讚根)·이화숙(李和淑)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헌납받았다. 동시에 조직 확대에도 노력하여 1917년 (음)1월 초 해주에서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 이근석(李根奭)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게 하였다. 이후에도 1917년 황해도 해주와 중국 간도지역을 다니면서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같은 해 (음)3월에는 빈민 구제를 위해 간도의 광제병원(廣濟病院)을 후원하였다. 1918년 1월부터 (음)4월까지 해주 읍내 등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6월 해주 조하동(趙夏東)의 밀고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풀려난 이후 민족교육과 역사서술 등을 통해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올바른 역사서술을 지향하였다. 민족사 보급에 노력하였으며, 특히 단군중심적인 대종교(大倧敎) 시각에서 단군사에 관한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보급하고자 하였다. 교류한 36명의 항일투쟁 활동을 열전으로 기술한 저서 『의용실기(義勇實記)』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강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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