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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得信

得信

1896. 2. 7 ~ 1958.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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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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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1896년 2월 7일 서울 서대문(西大門) 대연동(大然洞)에서 태어났다. 부친 유성윤(劉聖潤)은 서울에서 중국 호떡집을 경영하였으나, 가족 생계는 곤란한 형편이었다. 이명은 홍익수(洪益洙)이다. 1909년 양주군(楊州郡) 노해면(蘆海面) 월계리(月溪里)의 사립 창흥학교(昌興學校)에 입학하여 1912년 3월 졸업하였다. 1912년 12월 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1917년 3월 졸업하고, 그 해 6월부터 1918년 3월경까지 평북 영변(寧邊)의 북감리교회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18년 3월 서울 서대문밖 천연동(天然洞)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해 7월부터 이듬해인 1919년 5월경까지 경기 고양군(高陽郡) 한지면(漢芝面, 현 용산구 일대) 한강리교회 부속 한강여학교 교원으로 일하였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을 경험한 뒤,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중국 지린성(吉林省) 뤼허현(柳河縣) 구산쯔(孤山子)에 있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여 후일 함께 활동하게 되는 엄준(嚴浚)을 알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신흥무관학고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왔다. 1920년 3월 일본 도쿄(東京)로 가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해 4월 9일 도쿄의 간다구(神田區)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개최한 반도중학회 주최의 대웅변회에 참석하여 연설한 것을 비롯하여 각종 집회에 참석하여 배일 사상을 선전하였다. 이로 인해 4월 26일 일본 경시청으로부터 갑종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었다. 같은 해 7월 중순 신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와 부친 밑에서 생업에 종사하였다. 8월 17일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 상리면(上里面) 면장 이용년(李鎔年)의 소개로 고성군 대가면(大可面)의 사립 송광학교(松光學校) 교원이 되었다. 그러나 송광학교는 총독부의 학교 인가가 나지 않고, 경찰 또한 위험 인물로 보고 퇴거를 명하자, 같은 해 9월 23일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김상옥(金相玉) 의사의 어머니 김점순(金点順)으로부터 발신인이 없는 편지 1통을 전해받았다.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下往十里) 감리교회 김태현(金泰鉉) 목사 집으로 급히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받고 전부터 알고 있던 김태현 목사 집을 방문하여 김상옥을 만났다. 김상옥과는 배재학당 시절 집에서 동대문을 거쳐 학교까지 자전거로 통학할 때, 늘 동대문 길가에서 김상옥이 운영하던 영덕철물점 앞을 지나다니며 알게 된 사이였다. 김상옥은 자신이 조직한 암살단 취지서를 보여 주며 상하이(上海)로 탈출할 자금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한 뒤 권총과 탄환·폭탄을 주었다. 1920년 8월 24일 김상옥은 미국 의원단 일행의 서울 방문을 기해 조선 총독 이하 고관과 친일 거두 처단, 총독부 폭파 등을 준비하였으나, 실행 직전 예비검속으로 계획이 탄로나 피신 중이었고, 수사망이 좁혀오자 상하이로 탈출할 계획이었다. 이에 신흥무관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돌아온 엄준과 함께 김상옥 탈출 계획을 세웠다. 10월 9일 엄준과 함께 자신이 다니는 한강리교회 신자 중 만석꾼 임종상(林宗相)을 찾아가 독립운동자금을 요청하자, 임종상은 2천원을 약속하였다. 다음날 임종상으로부터 돈을 전달받자, 이를 김상옥에게 전달하여 상하이로 탈출을 도왔다. 1920년 12월 2~3일경 엄준과 함께 양주군 노해면 중계리(中溪里)의 송신묵(宋信默) 집에서 군자금 20원, 12월 6일 한강리 이만응(李晩應) 집에서 군자금 200원을 모집하였다. 1921년 1월 3일 서울 청진동(淸進洞)의 김유현(金裕鉉), 변호사 정구창(鄭求昌) 등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그들이 신고하자 협박문을 보냈다. 1월 5일 노해면 월계리의 김만원(金萬源)의 집에서 운동 자금을 요구하였고, 1월 10일 밤 예지동의 김영두(金永斗) 집에서 군자금 200원을 받았다. 1921년 1월 20일 밤 미근동(渼芹洞)의 이범렬(李範烈) 집으로 가서 군자금을 요구하는 등 7회에 걸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갈 자금을 마련하였다. 1921년 1월 김영두로부터 받은 100원권 수표가 단서가 되어 함께 활동하던 엄준이 붙잡혔다. 이튿날 청년회 서기인 학우 최봉창(崔鳳昌)의 도움으로 세브란스병원 안 김영배(金永培)의 집에 은신해 있다가 1월 16일 원익채(元益采)와 함께 붙잡혔다.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등으로 징역 1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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