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東旿
崔東旿1892. 6. 22 ~ 1963. 9. 1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임시정부
- · 화성의숙
- · 정의부
- · 조선혁명당
- · 민족혁명당
- · 임시의정원
- · 한국독립당
- · 좌우합작위원회
-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포상 정보
- · 독립장(1990)
관련 사건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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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0) 1892년 6월 22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마룡동(麻龍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의산(義山)이며, 이명은 최학원(崔學源)·지석호(池錫浩)이다. 1903년 여름 동학(東學)에 입교하였으며, 이후 천도교(天道敎) 세력의 중심 인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2일 최안국(崔安國)과 함께 의주 남문(南門) 밖 시가에서 군중들을 지도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3일에는 기독교계와 공동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위해 독립민회(獨立民會)를 결성하고 간사가 되었으며, 3월 4일에는 양실학원(養實學園)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 헌병대에 붙잡혀서 한 달 정도 수감되었다. 같은 해 9월 11일 국내의 한성정부(漢城政府)와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통합을 이루어 새롭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통합 이후 새롭게 구성된 내각에서 포고문을 발표하여 국내 동포들에게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그해 10월 천도교 의주대교구장 최석련(崔碩連)과 선천대교구장 이군오(李君五)의 후원을 받아 상하이로 망명하여 통합 임시정부에 참가하였다. 이후 1919년 11월 임시정부 의주군 조사원이 되었으며, 같은 달 14일에는 내무부 참사가 되었고, 1920년 3월 4일에는 내무부 지방국장에 임명되었다. 임시정부 내에서는 주로 안창호(安昌浩)를 도와 독립운동을 위한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또한 중국 관내지역 천도교인들의 단결과 권익보호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는데 손병희탄신축하연(孫秉熙誕辰祝賀宴) 등의 행사를 개최하여 교인들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이밖에 왕삼덕(王三德)·안정근(安定根) 등과 함께 북간도에 파견되어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1년 초부터 침체된 독립운동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 모색과 임시정부의 개혁을 위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하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고,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는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창조파(創造派)에 속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지도기관을 수립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에는 베이징(北京)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9월 일본에서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발생하고 재일 한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자 재동경지방조선인이재자위문회(在東京地方朝鮮人罹災者慰問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과 함께 도쿄(東京) 등지에서 거사를 일으키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의열단원 구여순(具汝淳)의 국내 거사를 도왔다. 1924년 3월 16일에는 천도교인 이민창(李民昌)을 비롯한 장건상(張建相)·서왈보(徐曰甫)·한진산(韓震山) 등 베이징지역 민족운동세력과 함께 동안시장(東安市場) 동안다루(東安茶樓)에서 관동대지진 때의 한인 학살 문제와 한국과 일본의 감리교 감독으로 있던 미국인 헐버트 웰치(Herbert Welch)의 망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회의에서는 관동대지진에서의 참상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알릴 것과 웰치에 대해서는 대표자 1명을 파견하여 항의하기로 결정하였다. 1925년 1월 20일 일·소조약의 체결로 양측 간에 우호관계가 성립되고 소련이 한국의 독립 지원 방침을 철회하자, 3월 7일 베이징의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 주최로 조양문(朝陽門) 내 조선기독교회에서 재류조선인유지대회(在留朝鮮人有志大會)를 개최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3월 1일에는 한교동지회와 고려학생회가 베이징대학(北京大學) 제2원에서 개최한 3·1절 기념행사에 참가하여 기념사를 하였으며, 쑨원(孫文)이 서거하자 3월 12일 교인 강구우(姜九禹) 등과 함께 천도교를 대표하여 조선화환(朝鮮花環)과 애도문(哀悼文)으로 조문하였다. 그러나 천도교 북경종리원(北京宗理院)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이 일제에 의해 세밀하게 파악되고 있는 상황에서 1925년 운동의 거점을 만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만주로 근거지를 옮긴 후에는 주로 정의부(正義府)에서 김동삼(金東三)·현익철(玄益哲)·김이대(金履大)·김원식(金元植)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초기에는 화성의숙(華成義塾)의 교장으로 독립운동의 인재 양성을 위해 힘썼다. 1925년 초 건립된 이 학교는 화뎬현(華甸縣) 휘발하(輝發河)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2년을 교육기간으로 하여 정의부 관할 각 현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하여 교육하였다. 1927년 11월에는 지린(吉林)에서 길림한교문제연구회(吉林韓僑問題硏究會)를 조직하고 대표로 활동하였는데 이른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체결의 여파로 재만 한인에 대한 일제 경찰의 탄압이 가중되고 중국 당국의 한인구축정책(韓人驅逐政策)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곤경에 처한 한인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9년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의 결과로 국민부(國民府)가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과 외교위원장(外交委員長)으로 활동하였으며, 국민부의 지도기관으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조직된 후에는 중앙위원 겸 외교부장에 선임되었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도발하고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자 만주를 떠나 다시 관내(關內)로 이동하여 유동열(柳東說)·현익철·이광제(李光濟)·김학규(金學奎)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임하였으며, 1933년부터는 법무장에 선임되었다. 1932년 11월에는 조선혁명당 대표로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목적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하고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난징(南京)에서 통일전선 정당으로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중앙집행위원 및 선전부장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 직에서 물러났다. 독립운동 전략과 자금 문제 등으로 조직 내에 의견 대립이 표면화되자 1937년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여 지청천(池靑天)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였다. 1937년 8월 조선혁명당을 비롯하여 김구(金九)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趙素昻)의 재건 한국독립당, 그리고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등 우파 단체들이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면서 다시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었다. 1939년 10월에 열린 제31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에 의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때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재직 중에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작전권을 제한하는 광복군행동9개준승(光復軍行動九個準繩)을 취소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1942년 10월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의 감사로 선임되어 민간외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1943년에는 임시정부 법무부장에 재임명되어 1944년까지 활동하였다. 조선혁명당과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을 통합하여 1940년 5월 한국독립당을 새롭게 창당하고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 겸 비서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15일 충칭(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귀국 후 1946년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 부의장,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우파 대표,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度立法議院)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南北連席會議)에 남측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1956년 납북인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在北平和統一促進協議會) 집행위원 겸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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