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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86. 2. 28 ~ 1946.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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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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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달성친목회
  • · 조선국권회복단
  • · 조선청년회연합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3) 1886년 2월 28일 한성부(漢城府) ‘우대마을(현 서울 종로구 옥인동)’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호는 자산(自山)·팔대수(八大搜), 필명으로 운문생(雲門生)을 사용하였다. 부인 유원(劉媛)과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을미개혁으로 신식교육제가 시행되는 첫해인 1895년 수하동소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혔다. 1898년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토론·연설 지도 수업을 받는 등 개화적 분위기 속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1899년 소학교 졸업 후 한성관립중학교에 입학하여 1902년 졸업하였다.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에 크게 감명받고 문화 개화의 길을 추구해 갔다. 10대 후반 행적은 분명치 않지만, 기독교 신자로서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 이회영·박용만·이관직 등과 긴밀한 관계였던 점으로 볼 때, 상동청년학원이나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덕기·박용만 등과 국어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서북 일대에서 사립학교 설립 등의 계몽운동을 펼쳤다. 이즈음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09년 마산의 기독교 선교학교인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1910년 7월 안동의 협동학교에서 의병에 의해 살해당한 교원을 추도하는 연설회가 열릴 때, 「교남교육 장래의 영향」이란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이때 국가의 기둥을 양성하는 신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910년 망국의 충격 속에서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거짓 광인(狂人) 행세를 하는 기행(奇行)을 보이기도 하였다. 1913년 대구 협성학교 교원으로 자리를 옮기는 한편, 우현서루(友弦書樓)의 모임에 나가 대구 지역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졌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의 전신인 달성친목회에 참가하였다. 1914년 일본으로 유학해 니혼대학(日本大學) 정치학과를 다니며, 서양정치사와 근대 민주정치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다. 유학 시절 동지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면서 일본에 머물며 독립운동의 방도를 찾는 것이 중국·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평소 안중근을 숭배해 일본에서도 안중근 사진을 품고 다녔다. 유학생 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에 「금일 유학생은 여하(如何)」(4호, 1915. 2), 「2천년래 유학의 결점과 각오」(5호, 1915. 5), 「조선의 문학」(6호, 1915. 7) 등의 글을 게재하였다. 1916년 귀국해 마산에 머물면서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해 마산지부장을 맡았다. 이형재(李亨宰)·김기성(金璣成)을 마산지부 단원으로 규합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달성친목회의 인적 기반을 바탕으로 1915년 (음)1월 경북 달성군 안일암에서 영남지역 유림들에 의해 만들어진 독립운동단체로, 표면상 시회(詩會)를 가장한 단체로 위장하였다. 이들은 민족의 상징인 단군(檀君)을 받들어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할 것과 만주와 연해주 등지의 해외 독립운동과 호응해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이 풍기광복단과 통합·개편한 대한광복회를 결성할 때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들이 참가하는 한편 대한광복회가 추진한 혁명 거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17년 무렵에는 운송업을 위장해 전국 각지를 무대로 활동하다가 평양에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이회영이 주도한 광무황제(고종)의 망명 계획에 참가하였다가 만세운동을 맞이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때는 창원지역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1,000명의 시위대를 동원해 강렬하게 만세시위를 벌였다. 1919년 가을 조선국권회복단의 조직이 발각되면서 40여 명의 단원이 붙잡혔으나, 일제 경찰을 피해 1919년 말 이회영·박용만을 만나러 베이징(北京)을 방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구체적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일제로부터 1920년 3월 면소 처분을 받았다. 1920년 봄 서울에 다시 나타났고, 6월 28일 서울 명월관에서 오상근·장도빈·장덕수·박일병·김명식·안준 등 50여 명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지방부를 맡았다. 같은 해 12월 2일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전국의 84개 청년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조선청년회연합회 창립총회를 개최할 때 집행위원과 교무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조선청년연합회는 3·1운동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전국의 청년단체들의 결속과 연대를 꾀하기 위해 만들어진 청년 연합단체였다. 표면적으로 독립운동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청년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참여도 적지 않았다. 1921년 3월 기관지 『아성(我聲)』의 발행인으로도 활약하였다. 그런데 1921년 4월 『자각론』과 『개조론』을 연합회의 이름으로 간행한 것을 두고, 서울청년회의 김사국이 문제를 제기하여 간부 사이에 분쟁으로 비화하자 발행인 자리를 내놓았다. 1921년 5월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상하이(上海) 등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는 한편, 다방면의 서적을 탐독하고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는데 힘을 쏟았다. 1922년 11월 필화사건으로 물러난 백대진의 후임으로 『신천지(新天地)』 발행인을 맡았으며, 사회운동보다는 저술에 몰두하였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과 서양문화의 맹종적 수용에 대항해 민족문화의 보전과 민족사의 정립을 시급한 과제로 받아들여 4개 부문 43책에 달하는 저술 계획을 세웠다. 1922년 『조선문학사』, 1923년 『조선문명사』를 비롯해 국어·국문학·한국사·국학 분야에 두루 걸쳐 많은 글들을 발표하며 국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이 무렵 섭렵한 자료가 8,500책에 달한다고 할 정도로 국학 연구에 열정을 쏟았다. 『조선문학사』는 국문학에서 최초로 통사적 체계를 갖춘 것으로, 근대적 국문학 연구의 출발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조선문명사』는 독립적이고 특수한 문명을 발휘한 한국 역사의 실체를 증명하고 바로잡는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역사 연구에 과학적 안목과 분석적 방법이 필요함을 주장하면서 근대적 사회과학의 토대 위에서 한국 역사를 재구성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 발전의 지표로서, 근대 민주정치에 이르는 실체로서 주목한 것이 자치제였다. 자치제는 단군시기에 존재한 것으로 보았으며, 자치제의 존재와 발전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면서 자치의 주체를 평민으로 보았다. 『조선문명사』는 당대 역사서 중에서 통사체의 정형을 보이면서도 체제와 서술에서 역사 발전과정을 충실히 담고 있으며, 시기 구분에서도 근대적 관점이 반영되는 등 한국 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역사서였다. 또 분류사와 비교사학의 견지에서도 한국사를 체계화한 선구적 저술이었다. 그리고 보편적 가치 위에서 한국사의 특수성과 우수성을 밝히려 하였던 점에서 비교사학의 단초를 이룬 것이었다. 1928년부터는 전통 음악인 아악(雅樂)을 연구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 아악부(雅樂部) 촉탁으로 들어가 4년 동안 아악의 기본적 정리를 마쳤다. 이를 토대로 국어학·국문학 분야에도 새로운 업적을 쌓아 갔다. 1931년 일제가 만주 침략에 이어 식민통치를 강화해 가자, 1933년 해외로 망명을 떠나 5년여 동안 만주와 중국 대륙,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 일본·하와이 등지를 떠돌며 유랑 생활을 하였다. 1938년경 국내로 돌아와 일체의 저술을 중단하고 정인보(鄭寅普) 등 가까운 지인들과 교유하며 지냈다. 광복 이후에는 정치 활동에 나서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선문법』·『조선문명사』·『조선문학사』·『조선무사영웅전』 등과 같은 저서가 있고, 「조선의 미술」·「조선철학사상개관」·「조선의 음악」·「조선상업사소고(朝鮮商業史小考)」 등 다방면에서 140여 편의 국학 관계 글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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