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龍鳳
安鳳1912. 4. 1 ~ 1957. 8. 2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권우성 적노대중그룹
- · 김희성그룹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6) 1912년 4월 1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상남면(上南面) 퇴촌리(退村里; 현 창원시 퇴촌동)의 순흥 안씨 세거지에서 아버지 안임상(安任相)의 2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상수(金尙洙)·(金相洙)·김성수(金性洙)·김학주(金學周)·김학동(金學童)·김학수(金學壽)·김수개(金壽介)·김명산(金命山)·김달문(金達文)·김종수(金鍾洙)·안승현(安承賢)·안승봉(安承鳳) 등을 사용하였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안가용봉(安家龍鳳)으로 고쳤다. 어려서부터 가난하여 집안의 농사일을 도왔다고 하며, 10살 때인 1922년부터 3년동안 고향인 퇴촌리에 있었던 퇴촌야학회에 다녔다. 1928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야마현(富山縣)의 제1 라미노(ラミノ)방직주식회사 직공으로 일하였고, 1930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잠시 농사를 지었다. 이후 1933년 6월, 서울로 올라와 계동(桂洞)에 살던 사촌 안승락(安承樂)의 집에 머물면서, 계동·가회동(嘉會洞)·신설동(新設洞) 등에서 날품팔이를 하였다. 이때 안승락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에 공감하여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였으며, 안창대(安昌大)·강귀남(姜貴男) 등과 함께 안승락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음모(資本主義) カラクリ』, 『제2빈핍물어(第二貧乏物語)』 등을 교재로 사회주의 이론을 배웠다. 이후 자유노동에 종사하면서 1934년 3월경 영등포에서 동지 김희성(金熙星)에게 사회주의 이론을 가르쳤다. 그 해 가을에는 경성고무공업소 여공 맹계임(孟桂姙)을 소개받아 사회주의 이론을 가르쳤다. 이어 1935년 5월 김희성의 소개로 이영섭(李永燮)과 함께 살면서, 동거 중이던 동생 안용대(安龍大)와 이영섭에게 사회주의 이론을 교육하였다. 1935년 1월경에는 김희성의 소개로 정재봉(鄭載鳳)을 만나 사회주의 운동 방향을 논의하였고, 같은 해 2월에는 정재봉의 소개로 권우성(權又成)을 만나 파벌의 배격, 통일전선 이론의 채용, 비합법 적색노동조합 조직 등 운동 노선에 대해 토론하였다. 4월경에는 이와무라(岩村) 제사공장(製絲工場) 직공이던 김희성과 연락하던 중 직공들을 대량 해고한다는 보고를 받고 해고수당 3개월분을 요구하며 전(全) 직공 동맹파업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이후에도 김희성과 지속적으로 만나 혁명적 노동조합 건설을 논의하였다. 1935년 8월경 권우성 그룹이 붙잡히면서 체포 대상이 되자, 서울을 떠나 고향인 창원과 부산(釜山) 등지를 오가며 지냈다. 그러던 중 1936년 6월경 검거를 피해 찾아온 김희성에게 피신 장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때 김희성 그룹과 연관되어 다시 한 번 일제 경찰의 검거 대상에 올랐으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붙잡히지 않고 기소중지되었다. 수배 중인 상태로 은거하던 중, 1940년 9월 처가인 창원군 창원면 반계리(盤溪里)에서 붙잡혔고, 9월 21일 경기도 경찰부로 압송되었다. 12월 10일 검찰에 송치되었고 12월 14일 기소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이듬해인 1941년 3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3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같은 해 경성복심법원에서 2심 판결이 있었는데, 공소 취하로 징역 1년 6월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은 후 1942년 10월 30일 풀려났다. 광복 후에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24일 경찰에 의해 창원 삼정자동 골짜기에서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사망일은 1957년 8월 24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공식적인 사망신고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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