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두
安秉斗1910. 7. 4 ~ 1950. 9. 1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5)
관련 사건
- · 공주적색비사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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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5) 1910년 7월 4일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주외면(州外面) 옥룡리(玉龍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이명으로는 한봉수(韓奉洙)를 사용하였다. 1928년 3월 공주공립보통학교(公州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의 진학을 포기하고 공주도서관에서 독학하였다. 1929년 11월 19일 개최된 서면대회(書面大會)에서 공주소년동맹(公州少年同盟)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집행위원장 겸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공주지역 청년운동을 이끌었다. 같은 해 12월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으로 공주고등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학내의 한국인 학생들이 총 단결하여 6일 동안 동맹휴학 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때 배후 선동 혐의로 공주청년동맹 집행위원장 윤귀영(尹貴榮)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의해 검속되었다. 1930년 3월 공주소년동맹 집행위원 자격으로 충청남도경찰부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글벗두레’란 결사, 상해한인청년동맹(上海韓人靑年同盟)의 관계서류, 당시 서울에서 붙잡힌 모종 사건의 연락관계 등 때문이었다. 1931년 10월 충남 공주군 우성면(牛城面) 방흥리(方興里)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하였다. 이에 박명렬(朴命烈)과 함께 각각 한봉수·방진완(方鎭完)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장에 들어가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 이때 농민들에게, “러시아는 사유재산 제도가 없다.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농민은 유복하게 되니 조선도 러시아와 같이 농민의 유복을 도모하자. 농민은 일치단결하여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자”라고 말하였다. 같은 해 12월 하순경 이영근(李英根)의 집에서 구자명(具滋明) 등과 회합하고 식민지 사회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사회주의 운동에 관해 협의하였다.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비밀결사 농민조합을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나아가 무산자 농민을 지도 교양하여 계급의식을 각성시켜 전위투사로 양성할 것을 모색하였다. 1932년 1월 초순경부터 박명렬·이도원(李道元) 등과 함께 이영근의 집에 홍영석(洪永錫)·천길영(千吉永) 등 점원과 노동자를 집합시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같은 해 2월 8일 동지들과 함께 공주읍 소재 음식점에서 6명의 노동자를 집합시켜 역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하여 연설하였다. 이처럼 농민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연설을 통해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깨우치는데 힘을 쏟았다. 1932년 3월 2일 공주의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 기숙사에 반제격문(反帝檄文)이 배포된 일이 발생하였다. 격문은 3·1운동 12주년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때 공주소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이력으로 배후로 지목되어 공주경찰서로 연행되고 가택수색을 당하였다.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공주적색비사(公州赤色秘社)’가 탄로나, 다시 약 1개월간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4월 2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송치되어 4월 9일 예심재판에 회부되었고, 9월 17일 종결되었다. 1932년 12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제1심 재판과정에서 활동 내용을 전면 부인하며, 경찰의 고문을 감당할 수 없어 진술한 것이라고 폭로하였다. 이에 검사가 공소하였으나 1933년 2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동안 미결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고, 2월 18일 풀려나 공주로 돌아갔다. 광복 이후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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