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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길현

安吉炫

1907 ~ 193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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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안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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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단천(端川)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단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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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관련 사건

  • · 단천군 삼림조합 반대운동(단천민요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2)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하다면(何多面) 양평리(陽坪里) 출신이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나이가 23세로, 1907년생으로 추정된다. 단천군 삼림조합 반대운동[단천민요사건(端川民擾事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사건의 발단은 무리한 조합설립에 있었고, 이 과정속에서 단천군 하다면의 삼림조합 (森林組合) 간수가 삼림단속 중 허달규를 도벌(盜伐)혐의로 취조하려다가 대신 허달규의 부인을 구타·감금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농민조합 간부들이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1930년 7월 18일 하다면의 면민 200여 명은 그 해 6월 들어 조합원들에게 과다한 조합비 납입을 강제하던 삼림조합 문제로 면사무소에 모였다. 이들은 다시 군청에 항의하기 위해 단천군청으로 이동하였고, 남대천(南大川) 부근에 이르렀다. 이때 일제 경찰이 군청으로 가지 말고 해산하면 사건을 잘 처리해 주겠다고 약속하였고, 이 말을 들은 면민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날 밤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오히려 주요 지도자 20명이 검거되었다. 이에 격분한 청년 지도자 이태은(李泰殷)을 중심으로 면민 400여 명은 다음날인 19일 아침 단천군청으로 몰려가서 오후 4시까지 시위를 하였지만, 강제로 해산 당하였다. 이에 단천 군내 8개 면민들은 다시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다음 날 7월 20일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단천군 농민들은 오전부터 단천 읍내로 모여들었고, 오후 4시경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성모의 사회로 군민대회를 열고 지도부의 사전 계획에 따라 질문위원을 선임하여 단천 읍내에 있는 군청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군수 임창재(任昶宰)를 면회하고 자신들에게 이익보다는 해를 끼치는 삼림조합의 해체와 이 사건으로 인해 검거된 54명의 면민을 석방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군수는 삼림조합은 절대로 해체할 수 없으며 구속자 석방 문제는 자신의 권한 밖이라는 이유를 들어 군민들의 요구를 모두 거절하였다. 이에 다시 한번 군중대표를 통해서 삼림조합이 이익이 된다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직접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마저도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격앙된 군중이 곤봉·돌·삽 등으로 무장하고, 군청 안으로 들어가 창문과 유리창 580여 개를 부수었다. 이때 군수와 군청 직원들은 전부 도망하였다. 이후 군중은 다시 근처에 있는 경찰서로 몰려가 검거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구속된 주민의 탈환을 시도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 30여 명이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공포탄 75발을 발사하였다. 하지만 군중은 해산하지 않고, 오히려 상황만 더 악화되었다. 결국 일제 경찰이 실탄을 일제히 발사하여, 하다면 연대리의 최두필(崔斗弼) 등 4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부상자도 26명이나 발생하였다. 당시 일제 경찰은 경부보(警部補) 이노우에(井上龍象) 등 10명이 부상하였다. 시위 도중 총상을 입고 크게 다쳤고,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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