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룡
裵成龍1896. 10. 28 ~ 1964. 12. 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화요회
- · 조선공산당
- · 정우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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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5) 1896년 10월 28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성주면(星州面) 경산리(京山里)에서 아버지 배운홍(裵運鴻)과 어머니 유윤이(柳允伊) 사이에서 차남(次男)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이명(異名)으로 배수성(裵秀星)·성산학인(星山學人)·성산생(星山生)·성산인(星山人)·별뫼 등을 사용하였다. 1912년 성주 공립보통학교(星州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조선총독부 임시 토지조사국(土地調査局) 측지과(測地課)에서 기수보(技手補)로 근무하였다. 1914년 토지조사국 일을 사임하고, 1915년에 성주 공립보통고등학교의 부훈도(副訓導, 교사)로 임명되어 약 4년간 학생들 교육에 종사하였다. 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1919년 만세운동 직전 교사직을 내려놓고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하여 학업에 매진하는 한편 여러 인사와 교류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으며, 조국의 독립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사회주의임을 깨닫고 사회주의 이론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1923년 7월 12일부터 8월 21일까지 「농민운동의 현재와 장래」, 「사회변혁과 사상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여러 차례 자신의 글을 게재하였다. 그러나 1년 만에 조선일보를 퇴사하게 되면서 청년들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확대된 농민·노동·학생운동에 가담하여 사회운동가로 변모하였다.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 운동은 사회주의 사상단체를 결성하는 사상운동의 형태가 주를 이루었는데, 화요회(火曜會)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화요회는 홍명희(洪命熹) 등을 중심으로 결성한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가 개편된 단체로서 연구회의 성격을 바꿔 당 건설의 행동 단체로서 역할을 담당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화요회에서 여성 사회주의 운동을 고취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며 독일의 사회학자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의 『부인론』을 『부인해방과 현실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발췌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25년 8월 동아일보에 「경제파멸의 원인 현상 및 대책」이라는 논문을 기고하여 당선되었고, 1926년에는 이 내용을 기초로 하여 『조선경제론』 저서를 출판하는 등 왕성한 저술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 이론가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제1차 검거 사건’이 발생하고, 1926년에 입당하여 경성부 제1 야체이카(ячейка)에 소속되어 합법적 공간과 비밀결사를 넘나들며 대중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사상단체를 통합하여 국내 사회운동의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는 대의(大意)를 이루기 위하여 화요회·북풍회(北風會)·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가 연합한 ‘4단체합동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합동위원회가 정우회(正友會)로 발전하면서 정우회의 집행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6년 7월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 사건’에 관계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 산입)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조선일보 경제부장을 역임하였고, 1931년 11월 조선중앙일보로 이직하여 경제부장과 정치부장을 겸임하면서 민족 문제에 관한 글을 여러 차례 기고하는 등 언론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일반 대중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36년 이후 국내 전시통제가 급격하게 강화되자 성북동(城北洞) 자택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민족의 절개를 지켰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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