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復源
源1886. 8. 1 ~ 1950. 9. 2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흥학회
- · 대한인국민회
- · 한국광복군 제2지대
- · 대동청년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중국 창사 남목청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6년 8월 1일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태어났다.한자를 달리하는 이복원(李福源)·(李腹源)이란 이명이 있고, 미국 유학 시절에는 Billy Lee로 불렸다. 중국에서 활동할 때 미숙(未熟)이란 호를 사용하였고, ‘미국 영감’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897년부터 2년간 북청에 설립된 지방의 육군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1899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갔다. 1902년 1월 졸업과 더불어 육군 보병 참위로 임관되었다. 이후 대한제국 군대의 진위대·친위대에서 장교로 복무하였고, 육군무관학교 교관도 맡았다. 육군연성학교 교관으로 복무할 때인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9월 3일자로 해임되었다. 군대해산 직후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이재과(理材科)를 다녔다. 이 기간동안 유학생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서는 간사원을 맡기도 하였다. 1914년 3월경 일본을 떠나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그 해 6월 상하이를 떠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1916년 6월 캘리포니아 남부에 있는 클레몬트의 업랜드 소학교를 마치고, 온타리오 중학교에 진학하여 1920년 6월 졸업하였다. 이후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주 렉싱턴에 있는 버지니아 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에 입학하여 4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다. 군사학교 졸업 후 뉴욕에 머물다가 1926년 시카고에 정착하여, 1931년까지 노스웨스턴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에 다녔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1927년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서기, 1930년에는 시카고한인학생회 회계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3·1기념 적립금, 국민회 총회 회관 수리비 모집, 장인환 장례비 모금 활동 등에 참여하였고, 1930년 11월 시카고에 신한민보사 지국이 설립되었을 때 방문기자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1933년 1월 미국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북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활동하다가, 1933년 말 한국독립군이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할 때 베이징(北京)을 거쳐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였다. 난징에서 김원봉(金元鳳)이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였고, 이때 ‘미국영감’이란 별명을 얻었다. 1935년 7월 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미주대한인독립단 등이 통일을 이루어 민족혁명당을 결성할 때, 이에 참여하였다. 결성 직후 당의 중앙감찰위원회 위원과 군사학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4월 지청천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만주에서 이동한 세력들을 중심으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군사활동을 위한 기구로 7월 15일 군무부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때 유동열·지청천·현익철·안경근·김학규 등과 함께 위원에 임명되었다.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보병조전·유격전술 등에 관한 군사학 서적들을 편찬하는 일을 맡았다.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자, 임시정부와 함께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이동하였다. 1938년 5월 7일 창사의 남목청(楠木廳)에서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3당 통합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였을 때, 조선혁명당 소속으로 참석하였다. 회의 도중 조선혁명당 소속의 이운환(李雲煥)이 권총을 난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현익철이 즉사하고 김구와 유동열은 중상,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이후 1938년 7월 임시정부와 함께 창사를 떠나 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 등지를 거쳐 1939년 5월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 도착하였다. 1939년 10월 치장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대한 보선이 이루어질 때, 함경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광복 때까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5월 민족주의 계열의 3당인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통합하여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할 때 참여하였고, 1943년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이후 광복될 때까지 광복군에서 활동하였다. 창설 당시 이웅(李雄)·김학규(金學奎)와 함께 총사령부 참모로 선임되었다. 창설 직후 총사령부를 전방 지역인 시안(西安)으로 옮겼다. 총사령 지청천과 참모장 이범석은 중국과의 교섭을 위해 충칭(重慶)에 남았고, 황학수(黃學秀)를 총사령 대리로 한 서안총사령부 잠정부서를 편성하여 총사령부를 전방 지역인 시안에 설치하였다. 이때 참모조 조장으로 선임되었다. 1940년 11월 말 시안에 도착하여, 총사령부 간부로 활동하였다. 시안의 총사령부에서 활동하며, 정훈처에서 발행하는 광복군 기관지인 『광복』에 세계대전의 정세에 대한 분석과 군사학에 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광복군 지도자들의 투쟁 경험, 미주지역과 적후방 동포들의 지원 등을 거론한 글이 주를 이룬다. 광복의 성공과 국권 회복 의지를 천명한 「광복군의 전도(前途)」, 독일 기계화 전투사단의 편제와 전술을 논의한 「덕국적장갑사(德國的裝甲師), 독일과 소련의 이해관계와 정세를 분석한 「미묘적덕소관계(微妙的德蘇關係)」 등이 대표적이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계기로 광복군의 전면적인 부대 개편이 이루어질 때, 제2지대 부지대장인 지대부(支隊附)에 임명되었다. 제2지대는 종전에 편제되었던 제1·2·5지대를 통합하여 편제한 것이었고, 지대장은 총사령부 참모장을 맡고 있던 이범석이 부임하였다. 1945년 5월 1일 정령(正領) 계급으로 총사령부 고급참모에 임명되었다. 고급참모에 임명된 직후 제3지대 부지대장으로 발령받았다. 제3지대는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을 중심으로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을 전개하던 징모 제6분처가 발전한 것으로, 1945년 3월 17일 통수부로부터 지대편설이 인준되었다. 1945년 5월 22일 푸양에 도착하여 제3지대 부지대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훈련 교섭을 위해 쿤밍(昆明)으로 출장을 갔던 지대장 김학규가 돌아오고, 정치지도원 겸 OSS훈련담당 엄홍섭(嚴弘燮)과 구대장 박영준(朴英俊) 등이 도착하자, 1945년 6월 30일 제3지대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1945년 8월 푸양에서 광복을 맞았다. 이후 광복군은 각 지역으로 파견되어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활동에 돌입하였다. 더불어 중국 각지에 이주해 있던 한인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확군 활동에 동원되었다. 제3지대 일부 대원들을 이끌고 쉬저우(徐州)로 가서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활동과 광복군의 확군 활동을 벌였다. 1946년 5월 광복군을 해체하는 ‘광복군 복원선언(復員宣言)’이 발표된 후, 광복군 대원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국군에 입대하기를 원하였지만, 60대 중반을 넘어선 고령이었다. 한편, 귀국 직후 청사동우회(靑士同友會)라는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지청천이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자 1947년 8월 이에 합류하였다. 가족도 없이 독신으로 살다가 6·25전쟁 중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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