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춘생
安椿生1912. 8. 12 ~ 2011. 1. 2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국광복군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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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3) 1912년 8월 12일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호는 악남(岳南)이다. 이명으로 안응무(安應武)·안용춘(安容春)·몽고왕(蒙古王)·왕형(王衡) 등을 사용하였다. 태어났을 무렵 집안은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었는데, 당숙이자 안중근의 사촌인 안명근(安明根)이 독립운동의 불길을 지펴야 한다는 일념에서 의거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었다. 안중근(安重根) 의사 의거에 이어 이른바 ‘안악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이로 인해 집안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황해 벽성군(碧城郡) 금산면(錦山面) 냉정리(冷井里)로 이주하였고, 1917년 여름에는 큰할아버지 안태진(安泰鎭) 등 안중근 일가가 이주해 있던 중국 지린성(吉林省) 무링현(穆陵縣)으로 향하였다. 부친 안장근(安莊根)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安定根)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간도참변 후 집안을 따라 무링현에서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퉁허현(通河縣)·이란현(依蘭縣) 등지로 유랑하였다. 그 와중에 1926년 3월 퉁허현의 양진학교(養進學校)에서 소학교와 중학 과정을 마쳤다. 이 무렵 풀려나서 건너온 안명근의 합류는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옥중에서 고문으로 불구의 몸이 된 안명근은 1927년 이란현에서 사망하였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공이 본격화되자,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헤이룽장성 하이런현(海倫縣)으로 마뎬산(馬占山) 부대를 찾아갔다. 그러나 이미 떠나간 뒤였기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하얼빈(哈爾濱)을 거쳐 국내로 들어왔다. 그러던 중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虹口) 의거가 성사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군 장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시 중국행을 결심하였다. 1934년 2월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청년투사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 내에 개설한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에 입교하였다. 지청천(池靑天)·오광선(吳光鮮)·조경한(趙擎韓)·이범석(李範錫) 등 만주에서 이동해 온 한국독립군 간부들이 교관으로 있었던 한인특별반에서는 김구(金九)와 김원봉(金元鳳) 계열의 청년과 한국독립군 출신 92명 학생에게 정치훈련·일반 군사교양·마술훈련(馬術訓練)·각종 포와 기관총 조작법 등을 교육시켰다. 한인특별반 입교생들은 신분 노출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때 ‘왕형’이란 이름을 사용하였고, 중국인 친구가 ‘악남’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1934년 8월 김구 계열의 입교생들과 함께 한인특별반을 중도 퇴학하였다. 이후 김구 계열의 청년대원 수용시설인 학생훈련소에 일시 수용되었다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36년 6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 보병과를 졸업한 뒤, 중국 육군 제2사 보충여3단 8연대에 배속되어 견습관 소대장으로 복무하였다. 주로 장쑤성(江蘇省) 타이현(泰縣)에서 모병한 신병 훈련을 맡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육군 제2사 소속으로 북진하였다. 다시 쑤저우(蘇州)를 경유하여 상하이에서는 비행장 수비 임무를 띠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 해 9월 철수 작전 시에는 상하이 장완(江灣)지구 원동운동장 부근에서 벌어진 야간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후송되어 치료받던 중, 임시정부로부터 일본군의 공격으로 난징(南京)이 위험한 상황이므로 임시정부 가족들을 철수시킬 선박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중국측과 접촉하여 목선을 구해, 장강(長江)을 따라 한커우(漢口)를 거쳐 광저우(廣州)까지 임시정부 가족을 이주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6개월여 동안 임시정부와 고락을 같이 하였고, 1938년 4월 중국군 대위로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경비사령부로 복귀하였다. 중국군에 복귀한 뒤에도 임시정부의 지시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상하이에서 폭탄을 구해 홍콩(香港)까지 운반하는 임무와 임시정부의 무전 암호를 상하이에 잠복해 있던 임시정부 특수공작반에 전달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39년 10월 중국군 육군 소령으로 진급하여, 병공서(兵工署) 제8감호대대(監護大隊)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감호대대의 임무는 러시아에서 들어오는 휘발유 등 군수물자 수송과 묘족(苗族)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동지 노태준(盧泰俊)으로부터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창건 소식을 듣고,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군사특파단의 일원으로 시안(西安)의 광복군 전방총사령부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서 조성환(曺成煥) 군무부장과 광복군 총사련군 참모 이준식(李俊植)을 만났다. 1941년 3월 광복군 제1지대 간부로 배속되었다. 제1지대는 징모(徵募) 제1분처라는 명의로 일본군 점령지역인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앤(太原)·스자좡(石家庄)·린펀(臨汾) 방면에서 한인들을 대상으로 초모(招募) 활동을 벌이는 한편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942년 7월, 광복군이 개편될 때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을 맡았다. 당시 제2지대장은 이범석, 제2구대장은 노태준, 제3구대장은 노복선(盧福善)이었다. 산시성(山西省)과 허난성(河南省) 일대에서 초모 활동을 벌인 결과, 한적(韓籍) 사병 30여 명을 탈출시켜 광복군으로 편입시켰다. 이후에도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서 한인 청년을 탈출시켜 광복군 대원으로 확보하였다. 초모 활동 결과 1945년 3월 말 광복군 제2지대의 규모는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모집한 사병들은 중국군 제34집단군에서 운영하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 내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과 중앙육군군관학교 제7분교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으나 귀국이 늦춰지면서 1945년 말 난징(南京)에서 일본군 출신 한적 사병 700여 명을 모아 잠편지대(暫編支隊)를 편성하고 지대장을 맡았다. 이들은 일본군의 장비를 접수하여 무장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1946년 6월 귀국 시에는 잠편지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에는 이범석이 창설한 민족청년단의 훈련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12월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반에 들어갔다. 6·25전쟁 중인 1951년 10월에는 4년제로 개편된 육군사관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다. 이후 육군 제8사단장, 국방부차관보 등을 역임한 뒤, 1961년 4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주택 마련을 목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기도 하였고, 제9대 국회의원, 제5대 광복회 회장, 독립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장, 제1·2대 독립기념관 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7년 독립기념관 건립에 공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가 1941년 출판한 『광복(光復)』에 실린 「미국 대일본 최근의 진공로(美國對日本最近的進攻路), 아랍사가 무장의 진상(阿拉斯加武裝的眞象)」 등의 글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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