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수
宋文壽1882. 11. 17 ~ 1940. 8.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1919년 경상북도 영일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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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2) 1882년 11월 17일 경상북도 흥해군(興海郡) 흥해면(興海面) 학성동(學城洞, 현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에서 아버지 송진섭(宋振燮)과 어머니 황씨(黃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1889년 3월 한문사숙(漢文私塾)에 입학하여 8년간 수학하였다. 1901년 8월 7일 포항 제일교회(第一敎會)에 입교하여 신앙 생활을 하다가 대구성경학교(大邱聖經學校)에 입학하였다. 1913년 4월 10일 대구성경학교를 졸업하고 포항교회(浦港敎會)의 시무(視務)로 취임하였으며, 1917년에는 최경성(崔景成)과 함께 포항교회 장로로 취임하였다. 1919년 영일군 포항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발발하여 서울·평양(平壤)·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西門市場)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 송라면(松羅面) 화진리(華津里)의 이재술(李再述)로부터 대구 만세시위와 그 취지를 듣게 되었다. 이에 3월 9일 이기춘(李起春)·이봉학(李鳳隺)·장운환(張雲煥) 등을 만나 당시의 정세와 만세시위 상황을 설명하고 대구와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논의한 뒤 3월 11일 포항 장날 원전동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나아가 이기춘과 이봉학은 다음날 10일부터 11일까지 김동은(金東殷) 등 여러 명에게 이 사실을 말하며 함께 참가할 동지를 규합하였다. 거사일인 3월 11일, 시위가 시작되기 전에 ‘독립만세’라고 쓴 장지(壯紙)가 면내에 붙은 것을 발견한 일제 경찰에 의해 이기춘, 이봉학과 함께 붙잡히면서 만세시위가 좌절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체포 소식이 포항면 일원에 전파되면서 3월 11일과 12일 이틀 동안 면내 수백 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특히 3월 11일 오전 10시에는 북본정교회 신자 수백 명이 교회에 모였다가 시내로 몰려나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이 시가 행진을 하면서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서편에 이르렀을 때 군중들은 1,000명이 넘을 정도로 늘어났다. 만세시위 열기는 이튿날에도 이어져서 3월 12일에도 이 지역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1919년 3월 11일 붙잡힌 뒤 기소되어, 같은 해 4월 29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1920년 10월 10일 흥해 중앙교회(中央敎會) 장로로 시무하였으며, 1921년 2월에는 흥해 신명학교(神明學校) 교감에 임명되어 학교 경비를 부담하는 등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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