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록
朴致祿1863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국민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평양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1863년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신양리(新陽里)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장로교(長老敎) 장로로 활동하였으며, 광문인쇄소(후에 광문사로 개칭)를 운영하였다. 1919년 평양부 장별리(將別里)에 거주하면서 평양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대한국민회 조직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펼쳤다. 1919년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3월 1일 오후 1시 숭덕학교에서 고종(高宗)의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봉도식은 기도와 찬송가로 조의를 표한 뒤, 사전 계획에 따라 대형 태극기를 단상에 게양하면서 독립선언식으로 전환되었다. 서문밖교회 목사 김선두(金善斗)가 독립선언식 거행을 선포하였다. 정일선(丁一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산정현교회 목사 강규찬(姜奎燦)과 김선두(金善斗)의 연설 후 애국가를 제창하였다. 봉도식에 참석하였다가 미리 준비해둔 태극기를 받아들고 군중과 함께 행렬을 지어 독립 만세를 외치며 큰 거리로 나아갔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일자 미상일에 평양지방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를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1919년 7월 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다시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로서 만세를 불렀고, 인쇄 영업자로서 영업을 위해 인쇄한 것은 무죄”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는데, 그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는 기각되었으나, 검사의 부대 상고에 의해 1심 판결이 파훼되고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한편 평양복심법원 판결 직후인 1919년 7월 20일 보석으로 풀려난 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조직에 가담하였다. 그 해 9월 중순 평양의 기독교 신학교에서 박인관(朴仁寬)·박승명(朴承明)·전군보(田君甫) 등 10여 명과 함께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회계를 역임하였다. 1920년 8월 16일 미국 의원단의 한국 방문에 대한 예비검속으로 변인서(邊麟瑞)·김성택(金聖澤) 등과 함께 붙잡혔다가 8월 26일 풀려났다. 1921년 2월 대한국민회 활동이 발각되어 다시 붙잡혔다. 이후 다양한 사회운동과 경제활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 7월 30일 평양물산장려회(平壤物産獎勵會)가 조직되었을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22년 4월 27일 평양 대동부인상총회(大同婦人商總會) 창립총회에서 상의원(常議員)에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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