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98. 5. 3 ~ 1961. 4. 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한청년당
- · 조선공산무정부주의연맹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원산흑색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98년 5월 3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북면(臨北面) 계곡리(桂谷里)에서 아버지 유이흠(柳頤欽)과 의성김씨 김성옥(金性玉) 사이에 삼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어릴 때 화종(花宗)이란 이름을 쓰다가 1919년 항렬에 맞추어 화영(華永)으로 개명하였다. 호를 월파(月波)·단주(旦洲)로 쓰고, 다른 이명으로 고상진(高尙眞)·고자성(高自性)·하성기(河性基)·김영진(金永鎭) 등을 사용하였다. 활동 후반기에 단주라는 호가 주로 사용되었다. 만 11세가 되던 1905년 고성이씨 이난이(李蘭伊)와 결혼하였다.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서당 교육을 통해 9세에 사서삼경을 익혔다. 그러다가 1907년 경북 북부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3년제 신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에 입학하여 1911년 3월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한 해 앞서 나라가 망하였다는 경술국치 소식을 듣자마자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고 혈서를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졸업하던 무렵 스승이자 협동학교 주역인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들로부터 민족의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독립운동에 나선 첫 걸음은 20대 청년 시기에 시작하였다. 대구와 안동을 오가면서 1915년 대구에서 정진탁(鄭振鐸)과 부흥회(復興會)를 조직하였고, 1917년에는 대구에서 김용하(金容河)와 함께 자강회(自彊會)를 조직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활동 과정에서 1915년 경찰에 붙잡혔다고도 한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는 협동학교 인사들과 임동면 전주 유씨 문중이 대거 참가한 안동군 임동면 중평리 편항(鞭巷) 장터(챗거리 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이 시위는 시작되자마자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부수고 일제 경찰로부터 무기를 빼앗아 우물에 처박아 버리는 격렬한 양상을 보인 탓에 시위 주도자들은 중형을 받았고, 협동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만세운동 이후 만주 망명을 결심하고 가산을 대부분 정리한 뒤, 모친과 아내, 그리고 만 네 살이 된 아들 원식(原植)과 함께 국내를 떠났다. 중국 펑톈성(奉天省) 라오중현(遼中縣)에 잠시 머물다가 이상룡(李相龍)과 김동삼을 비롯한 안동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터를 잡고 있던 남만주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갔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잠시 활동한 뒤 1920년 여름 활동무대를 중국 본토지역으로 옮겼다.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였다. 1921년에는 베이징(北京)에서 신채호(申采浩)가 펴내던 잡지 『천고(天鼓)』 발행을 도왔다. 이 무렵 아나키즘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공부를 위해 학문적 성숙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쓰촨성(泗川省) 청두(成都)의 청두대학(成都大學) 사범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 유학을 위해서 가장 큰 과제가 학비를 마련하는 것이었고, 중국 학교에 관비생이 되기 위해 이름을 고상진(高尙眞)으로 고쳤다. 이곳에서 사상적으로도 성숙하여 상당한 이론으로 무장한 아나키스트로 성장하였고, 영어·프랑스어·에스페란토어를 익혔다. 1926년 초 청두대학을 졸업하고 광저우(廣州)·우한(武漢)·난징(南京)·상하이 등을 돌아 펑톈에 도착하였다. 1927년 지린(吉林)에서 아나키스트 김종진(金宗鎭)을 만나 만주 중동선(中東線) 일대 지역을 활동지로 삼는 한편, 하이린(海林)으로 가서 신민부(新民府) 대표 인물인 김좌진(金佐鎭)과 합류하였다. 이때 김좌진과 여러 차례 격론을 벌였다. 주된 내용은 당시 민족주의계와 공산주의계가 벌이고 있던 갈등을 해결하는 방안이었다. 김좌진에게 “사상은 사상으로라야 막을 수 있는 것이니까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라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은 “주의가 구극(究極)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요 동시에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인 이상에야 그 목적을 위하여, 또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할 것이지 꼭 남들이 주장하여 오는 무슨 주장이라야 될 것은 아니라”고 반론을 내세웠다. 당시 팽창하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부분적 수용이나 접합을 염두에 두던 김좌진과는 달리, 이를 단호하게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이 때문에 몇 차례 격론을 벌이다 끝내 지린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민족해방과 식민지 권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새로운 지배 권력을 꿈꾸는 자본가 계급과의 연합을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몇 차례 격론이 벌어지다가 끝내 정의부(正義府)가 있던 지린성 화디엔현(華甸縣)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국내의 아나키즘운동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 1925년부터 조직된 국내의 아나키즘운동은 1920년대 후반에 들어 전국 각지에 단체를 결성하고, 1929년 11월에 평양에서 전조선흑색사회주의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主義運動者大會)를 준비하고 있었다. 최갑룡(崔甲龍)이 중심이 된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가 그 준비를 맡았다. 이 대회에 참가하려고 평양을 방문하여 11월 1일 이홍근(李弘根)·최갑룡·조중복(趙重福)·임중학(林中鶴) 등과 함께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비밀리 조직하였다. 이 연맹은 ‘현재의 국가제도’를 폐지한다는 말에서 일제 타도의 의지를 표명하고, 자유연합에 기초한 무정부주의 사회 건설 의지를 내세웠다. 그리고 사유재산제도가 바탕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를 거부하고 지방분권적인 산업조직을 추구하였다. 이어서 각 지역에 대한 활동을 분담할 때 만주 방면을 맡았다. 그러던 중 11월 7일 밤 대동경찰서에 붙잡혀 매일 조사에 시달렸다. 그러나 뚜렷한 혐의를 찾지 못한 일제 경찰이 추방시키는 바람에 만주로 되돌아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많은 학생들이 만주로 탈출해왔다. 이에 의성숙(義誠塾) 또는 義誠學院(봉천중학)이란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1931년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힐 때까지 400명이나 되는 학생을 가르쳐 중국 학교에 입학하도록 도왔다. 이 활동은 단순한 교육이나 유학 알선이 아니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의 비밀 합의 사항인 인재 양성을 실천한 것이었다. 의성숙 운영에 몰두하던 1931년 10월 초 일본군이 만주를 침공한 ‘만주사변’ 직후 원산경찰서 형사대에 붙잡혔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연맹 존재가 일제 정보망에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붙잡힌 지 2년이나 지나도록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933년 3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원산흑색사건’이란 이름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자, 서울로 옮겨져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그 후 상고심에서 상고 기각 판결을 받고 1937년 10월까지 미결기간을 포함하여 실제로 6년 동안이나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2차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1937년 10월은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여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석 달이 지난 시점이었으므로, 베이징과 톈진(天津)·펑톈 일대를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활동 장소를 찾지 못하였다. 이에 전선을 넘어 중국공산당 본부가 있던 옌안(延安)으로 향하였다. 아나키스트로서 공산주의를 배격하던 처지였지만, 옥살이하던 동안 독립운동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공산주의가 항일투쟁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고, 제2차 국공합작까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양대 축이 형성되고, 따라서 중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관할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가지 영역 가운데 먼저 찾은 곳이 옌안이었다. 옌안에서 마오쩌둥(毛澤東)과 김두봉(金枓奉)을 만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구체적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그 후 1942년 충칭(重慶)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았다. 이미 아나키스트 정당 조직인 조선혁명자연맹과 좌파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이 임시정부에 동참하고 있었다. 좌우합작으로 통합 정부를 달성한 상태였고, 조선의용대도 앞서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좌우 합작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임시정부 참여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에 합류한 이유에 대해 “독립을 달성하고 이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면, 우선 민족을 대표할 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민족의 당면 과제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그러한 조직을 ‘전 민족의 자율적 기관’인 임시정부에서 구현하려 한 것이다. 뒷날 자신이 참가한 임시정부에 대해 “기미운동 때에 민족의 총의로 출발한 임시정부”라고 표현하다. 1942년 10월 20일 김원봉(金元鳳)·김상덕(金尙德)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경상도 출신 의원으로 뽑혔다. 임시정부가 좌우합작을 이룬 통합정부를 달성한 시절이었다. 여기에 아나키스트 정당인 조선혁명자연맹 대표로 참가한 것이었다. 1943년 2월 16일부터 임시정부 외교위원회의 연구위원이 되었고, 그해 4월 10일 임시정부에 선전부가 만들어지면서 조소앙(趙素昻)·신익희(申翼熙)·엄항섭(嚴恒燮) 등 14명과 함께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4년 4월 국무위원(무임소)으로 선임되어 1945년 12월 귀국할 때까지 국무위원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이외에도 비정부 차원의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43년 5월 열강이 전쟁 뒤에 한국을 국제 감시(공관통치·신탁통치) 아래 둔다는 소식에 맞서 충칭에서 재중국자유한인대회가 열리자,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성토하였다. 따라서 귀국한 뒤 신탁통치 소식에 극력 반대하고 나선 것도 충칭에서 펼친 활동의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또한 1942년 한중 양국의 지도자들이 조직한 민간기구인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환할 때 제2진에 속하여 12월 1일 돌아왔다. 환국한 뒤 신탁통치를 반대하였으며, 외세를 배격하면서 자주적 통일 민주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다. 독립노농당을 결성하고 『노농신문』을 창간하여 노동자와 농민이 주체가 되는 사회를 만든다는 목표를 내걸고 활동하였다. 아나키스트로서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다시 그 이론으로 자주통일정부 수립과 노농대중을 위해 살다가 1961년 4월 1일 사망하여 수유리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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