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화
朴致和1880. 7. 11 ~ 1947. 7.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하동군 하동읍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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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80년 7월 11일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적량면(赤良面) 동산리(東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진주악육고등학교(晉州樂育高等學校)를 졸업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하동군 적량면 면장(面長)을 하고 있었다. 3월 18일 하동읍(河東邑) 장날 전개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전국적인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3월 14일 면장직을 사직하고 하동 읍내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우선 태극기를 제작하여 시장 근처에 맡겨 두었다. 그리고 정낙영(鄭洛榮)·정인영(鄭寅永)·이성우(李聲雨)·이범호(李範鎬)·박종원(朴宗源)·이병홍(李炳鴻)·정희근(鄭禧根)·김응탁(金應鐸)·이보순(李輔淳)·황학성(黃學成)·김두순(金斗淳)과 함께 이병홍이 운영하던 하동 읍내 대서소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3월 18일은 하동읍 장날이었다. 오후 3시 무렵 시장에 쌓아둔 소금 가마니 위에 올라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운동 취지에 관한 연설을 한 후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군중 1,50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으나 검사의 항소로 다시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같은해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이 취소되고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동생 박문화(朴汶和) 또한 4월 7일 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했던 하동읍 만세운동을 이끌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풀려난 후, 1920년대 중후반에는 적량교육회 조직에 참여하여 지역의 아동교육 활성화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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