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致律
朴致미상 ~ 1919. 3. 7
포상 정보
- · 애국장(2000)
관련 사건
- · 철산군 철산읍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0) 자료의 한계로 정확한 출생지나 생년월일 등은 확인할 수 없다. 1919년 3월 7일 철산군 읍내 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철산군(鐵山郡)의 읍내 장터 시위는 철산교회가 운영하고 있던 사립 명흥학교(明興學校)의 교사 안태영(安泰英)이 3월 1일 선천군(宣川郡)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독립선언서 한 장을 들고 급히 철산으로 돌아오면서 계기가 마련되었다. 안태영은 명흥학교 숙직실에서 교장 심치규(沈致珪), 교사 유봉영(劉鳳榮), 기독교인 김영락(金永洛) 등에게 선언서를 보여주고 각지에서 펼쳐지고 있는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였다. 이들은 철산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지역의 기독교계, 천도교계, 일반 사회인 중에서 각각 대표자를 모아 계획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시위 주도자들이 동부동(東部洞)의 유봉영의 집에 모여 네 차례의 회합을 더 가지고, 3월 7일 장날을 기해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집합 장소는 동부동의 기독교 예배당으로 결정되었다. 기독교 측에서 태극기 제작을, 천도교 측에서 선언서 등사를 하기로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3월 7일 장터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예배당 종소리를 신호로 동부동의 예배당에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철산의 기독교계, 천도교계, 일반 주민을 망라하여 예배당에 모인 인원은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시가 행진에 나섰을 때는 장터에 있던 이들까지 만세를 부르며 합류하여 시위 군중의 규모는 계속해서 불어났다. 훗날 평안북도 도장관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에 시위대의 규모가 5,000여 명이었다고 보고하였다. 동부동에서 출발하여, 철산 군청과 경찰서가 있는 서쪽으로 향하는 시위 군중의 뒤를 철도원호대(鐵道援護隊)가 뒤따르며 해산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들은 다른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것과 앞서 철산의 차련관(車輦館) 인근에서 시위가 일어난 것을 보고 경각심을 가지고 있던 일제 경찰의 지원 요청으로 미리 철산에 들어와 있었다. 큰 충돌 없이 행진하던 시위대가 우편국 앞을 지날 때 사건이 생겼다. 우편국에 있던 일본인 직원이 시위대를 보고 조롱하고 비웃으며 욕설을 하였다. 분노한 시위 군중이 옛 감옥 자리의 돌담을 헐어 돌을 우편국을 향해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빌미로 뒤따르던 일본군 철도원호대가 총탄을 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전혀 무장하지 않은 채로 일본군의 총과 검에 노출된 데다가,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경찰서 앞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서 공격을 피할 수 없어 인명 피해가 속출하였다. 당시 철산에는 두 군데의 병원이 있었다. 한국인이 개업한 철산의원(鐵山醫院)이 멀지 않았으므로, 총탄에 맞거나 총검에 찔린 부상자들 다수가 철산의원으로 실려 갔다. 의사와 조수 단 둘이 진료를 하고 있던 철산의원에서는 밀려드는 부상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물품도 부족하여 붕대가 떨어지자 부상자의 옷을 찢어 그 천으로 상처를 막아야 했다고 전한다. 부상자들에 대한 일화도 당시의 처참하고 급박한 상황을 전한다. 백양면(栢梁面) 출신의 김용준(金龍俊)은 총알이 복부를 관통하였다거나, 문기황(文基璜)의 처는 총알이 저고리 고름에 매어 놓은 동전에 부딪혀 살았으나 튀어 나간 총알이 오른팔의 관절을 뚫어 결국 오른팔은 잘라내야 했다고 한다. 만세시위는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치르고 시위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종료되었다. 이날 시위에서 발생한 사망자 7명 중 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