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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희

朴鍾喜

1889. 5. 9 ~ 1929.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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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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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1)

관련 사건

  • · 청양군 목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1) 1889년 5월 9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목면(木面) 화양리(華陽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6일 청양군 목면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청양군 목면 만세시위는 정산면(定山面)의 홍범섭(洪梵燮) 등 유림 주도로 전개된 1919년 4월 5일의 정산시장 만세시위에서 사망한 권흥규(權興圭)의 시신 운구 과정에서 일어났다. 홍범섭·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은 정산면 서정리(西亭里) 정산시장의 장날인 4월 5일 오후 시장의 주민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이 즉각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한 홍범섭 등 30여 명을 붙잡아 헌병분견소로 연행하였다. 만세시위자에 대한 일제 헌병의 폭력적인 탄압에 분노한 주민들은 대거 헌병분견소로 몰려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서 가장 격렬하게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던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다음날인 4월 6일 아침 권흥규의 친인척과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헌병주재소로부터 시신을 인수하여 고인의 자택이 있는 목면 안심리(安心里)를 향해 운구를 시작하였다. 운구의 선두에는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깃발이 있었고, 수많은 만장이 그 뒤를 이었다. 운구가 화양리를 지나갈 때 마을 주민들과 함께 노제를 지내고 운구 행렬에 동참하였다. 이후에도 운구가 지나가는 길목의 마을마다 주민들이 통곡하며 운구 행렬에 동참하였다. 이에 따라 운구 행렬의 규모는 점점 더 확대되어 1,000여 명을 넘게 되었다. 운구가 지곡리(池谷里)를 지날 즈음부터 운구행렬 속에서 ‘조선독립만세’의 구호가 시작되었고, 운구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안심리를 향해 나아갔다. 이때부터 운구 행렬과 만세시위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운구 행렬이 대규모의 만세시위대로 돌변하자, 일제는 공주(公州)의 헌병대를 안심리 방면으로 급파하였다. 이들은 운구 행렬과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발포하였다. 이로 인해 권흥규의 조카딸을 비롯하여 권영진(權寧鎭) 등 여러 사람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 헌병대의 총탄은 피했으나 주도자와 적극 가담자에 대한 체포망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일제 헌병에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에서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3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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