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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申翼熙

1894. 6. 9 ~ 1956.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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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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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廣州)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광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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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재일유학생학우회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한중호조사
  • · 한국혁명당
  • · 신한독립당
  • · 조선민족혁명당
  • · 조선청년전위동맹
  • · 한중문화협회

포상 정보

  • · 대한민국장(1962)

관련 사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장(1962) 1894년 (음)6월 9일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초월면(草月面) 서하리(西霞里)에서 평산(平山) 신씨 장례원경(掌禮院卿) 신단(申檀)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해공(海公)이며, 중국 망명 중에 사용한 이명(異名)은 왕해공(王海公)·왕방오(王邦午)이다. 5세부터 맏형 규희(揆熙)에게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글씨를 잘 써 9세 때에는 학부대신을 지낸 이도재(李道宰)로부터 지필묵(紙筆墨)을 상품으로 받기도 하는 등 명필가의 자질을 보였다. 1908년 서울로 올라와 관립 한성(漢城) 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였다. 당초 두 갈래로 공부할 길을 생각하였다고 한다. “하나는 법관양성소에 다녀 법률을 배워 무지한 민중이 법망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구제하여 보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영어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배워 서구의 진보한 문화를 흡수하려는 것”이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일제로부터 국권을 되찾고 민족적 수모를 설욕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진보한 문명을 수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임을 깨달고 영어과를 선택하였다. 1910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였다. 하지만 그 해 일제로부터 주권을 빼앗긴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우리는 현실을 직시(直視) 정시(正視)하여야 한다. 우리가 구적(仇敵)을 몰아내고 나라를 도로 찾는 데는 부질없이 감상에만 흐르지 말고, 현대로 개화 진보한 일본에 가서 배워 그 놈을 이기고 일어서야 한다"며 일본 유학을 결행하였다. 1912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여 독립운동에 전위가 될 유학생들을 결속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재일 유학생들은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가 해산된 후 사분오열 상태에 있었다. 당시 함경도 출신 유학생들은 철북구락부(鐵北俱樂部), 평안도 출신 유학생들은 패서친목회(浿西親睦會), 전라도 출신 유학생들은 호남다화회(湖南茶話會), 경기도 출신 유학생들은 삼한구락부(三漢俱樂部)로 나뉘어 있었다. 이때 정세윤(鄭世胤)·송진우(宋鎭禹)·문일평(文一平)·안재홍(安在鴻) 등과 협의하여 유학생의 통일조직으로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 평의회 의장,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기관지로 발행된 『학지광(學之光)』의 주필, 총무 등을 맡아 유학생들은 물론 국내 청년학생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17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온 나는 미국 유학에 뜻을 두었다. 그것은 서구의 문화와 진보된 과학을 흡수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여 저지르는 모든 학대를 세계에 호소하고 독립운동을 하여 보려는 데 있었다”고 하는 말대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유학이었다. 그러나 미국 유학은 경비 문제로 성사되지 못하였고, 귀국 후 최규동(崔奎東) 교장의 요청으로 중동(中東)학교에서 교사를 지냈다. 이어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로 옮겨 비교헌법과 국제공법, 재정학 등을 강의하였다. 이어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이를 기회로 독립운동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최린(崔麟)·임규(林圭)·송진우(宋鎭禹)·최남선(崔南善)·정노식(鄭魯湜) 등과 국내 독립운동을 남몰래 의논하고, 그 해 11월 말 국외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상의 연락할 의무를 맡아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 독립운동은 처음에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시작할지라도 결국에는 군사행동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선 만주지방으로 가서 독립군 지도자 김좌진(金佐鎭) 등을 만났다. 그리고 1919년 1월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여 국내 독립운동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소식이 없었고 이에 궁금한 나머지 그 해 2월 중순 상하이를 떠나 텐진(天津)·베이징(北京)·선양(瀋陽)을 거쳐 1919년 만세운동 발발 직후인 3월 2일 귀국하였다. 국내로 들어와 평양을 지나면서 평양 만세운동을 목격한 뒤 곧 서울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때 제자인 보성전문학교 학생 강기덕(康基德)과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학생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하여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 앞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된 제2차 대규모 서울 만세시위가 남대문역 앞에서 전개되었다. 이 시위는 그 해 3월 3일 고종(高宗)의 장례식에 참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만세운동의 지방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자 3월 14일 농사꾼 차림으로 용산역을 빠져나와 상하이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3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하여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이에 적극 동참하였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인사들은 우선 그 해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大韓民國 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4월 11일 임시헌장을 제정한 뒤 임시정부의 수립을 공포하였다. 이때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국무원에 내무·외무·재무·교통·군무·법무 6부를 두어 내각 구성원을 선발하였을 때 초대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 대리로 선임되었다. 이어 임시정부 내무차장으로서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부임한 안창호(安昌浩)를 도와 1919년 7월 연통제(聯通制)를 창안하고 실시하는데 기여하였다. 연통제는 1919년 7월 10일 임시정부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된 임시정부식 지방자치제이다. 임시정부는 국내를 직접 통치하고 원활한 연락망을 구축하기 위해 연통제를 시행하였으며, 이에 따라 비밀 지방행정기인 연통부(聯通府)를 각지에 설치하였다. 연통부는 임시정부의 법령과 공문을 전파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그 해 9월 11일, 출범한 통합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을 기초하기도 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대리, 외무총장 대리, 국무원 비서장 등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1년에는 법무총장·외교부장·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의 분열을 방지하는데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특히 1921년 4월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창립하여 한중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어 1922년 3월 독립운동의 최고기관과 방락을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임시정부에서 요구되었을 때, 독립운동계 통합을 목적으로 국민대표회의 소집 건의안을 제출하였다. 같은 해 6월 24일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서 국민대표회의 소집 찬성에 관한 입장과 회의 참석 필요성을 재차 밝혔다. 이어 1922년 7월, 임시정부 내부 분열 수습과 독립운동계 합의를 이끌어 갈 목적으로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의 개편을 둘러싸고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이 지속화되어 첨예화되던 시기, 평소 주장하던 대일 군사항전을 한중합작으로 실현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군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산시성(陝西省) 독군(督軍) 후징이(胡景翼) 막하의 고문으로 들어가 국민당 제2군의 중장(中將)이 되었다. 이 시기 중국학생과 한국청년 500명을 모집하여 유격대의 일종인 분용대(奮勇隊)를 편성하고, 이들을 훈련시킨 뒤 만주로 간 후 한중 국경에서 군사행동을 일으켜 국내로 진격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속성과를 제1회로 졸업하고 의열단(義烈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성주식(成周寔)을 북만주에서 초빙하여 국민당 제2군 육군 중위에 임명하였다. 그 뒤 분용대 연성대장의 책임을 맡겨 국내진공작전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시켜 갔다. 하지만 1924년 가을 후원자인 후징이가 갑자기 사망함에 따라 분용대에 의한 국내 진공작전 계획은 좌절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1926년 북벌 중인 장제스(蔣介石)·바이충시(白崇禧)와 난창(南昌)에서 만나 분용대 병력과 훈련 상황을 소개하고 한중합작으로 한만 국경의 일본군 토벌을 건의하였다. 이들은 당시 자국 혁명에 주력하였기에 한중합작에 따른 국내 진공작전 계획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후 1927년부터 난징(南京) 국민당 정부의 심계원장(審計院長) 위유런(于右任)의 배려로 심계원에 근무하였다. 이즈음 독립운동계에는 중국 국민당과 같은 민족대당을 결성하여 ‘이당치국(以黨治國)’ 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었다. 1927년 3월 제3차 개헌을 통하여 임시정부도 ‘이당치국’의 형태를 도입한 개정 헌법을 발표하였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각각의 운동방략과 이념, 친소(親蘇)관계 등에 따라 독립운동을 제1차적 목적으로 하고, 독립 후 신국가건설이나 민족사회 개혁 방안을 정강으로 제시하면서 독립운동 정당을 창당하여 나갔다. 이후 1931년 1월 윤기섭(尹琦燮)·성주식·김홍일(金弘壹) 등과 난징에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산하 단체로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여 무장독립투쟁을 준비하는 한편, 『우리의 길』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일제는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滿洲事變)과 1932년 1월 상해사변(上海事變)을 도발하여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 단체와 정당들은 대일항전에 힘을 모으고자 민족협동전선의 형성에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2년 11월, 한국혁명당 대표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의열단·한국광복동지회(韓國光復同志會) 등 대표들과 협의하여 민족협동전선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탄생시켰다. 이 동맹에서 최동오(崔東旿)·김두봉(金枓奉)·김규식(金奎植)·박건웅(朴建雄)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통일동맹은 가맹단체 간의 연락 협의기관으로 일종의 단체 연합적 성격을 띠었기에 민족의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으로 단일대당(單一大黨)의 결성이 요청되었다. 1933년 말 단일대당 형성의 일환으로 우선 한국혁명당을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관내 지역으로 이동한 한국독립당과 합쳐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하였다. 이를 매개로 기존의 독립운동정당과 단체를 해소하여 단일대당을 창당하는 방식의 민족통일전선 형성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난징 진링(金陵)대학에서 신한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등 5당 통합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의 창당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조소앙 등 한국독립당 재건파가 탈당하고, 1937년 민족혁명당 제2차 전당대회를 계기로 지청천(池靑天) 등 일부 인사가 이탈함으로써 그 세력이 위축되었다. 1937년 7월 7일 일제는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거점(據點)과 병참선(兵站線)으로 이루어지는 대륙침략 작전으로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독립운동계는 중일전쟁에 대응하여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 결성이었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 등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 결성이었다. 이때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에 참여하였고, 그 뒤 중국 각지를 순방하면서 대일항전을 지도하였다. 그러던 중 1938년 9월 민족전선 내의 급진적 무장투쟁 단체로 후베이성(湖北省) 한커우(漢口)에서 새롭게 조직된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의 지도위원이 되었다. 독립운동계의 분립은 대일항전 수행에 차질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기에 두 계열의 핵심 인물인 김구(金九)와 김원봉(金元鳳)은 1939년 5월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에서 통합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곧 이어 그 해 8월 27일부터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통합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광복진선 측 3당 대표로는 한국국민당의 조완구(趙琓九)·엄항섭(嚴恒燮)·한국독립당의 홍진(洪震)·조소앙, 조선혁명당의 지청천·최동오 등이 참석하였다. 민족전선 측 4당 대표로는 민족혁명당의 성주식(成周寔)·윤세주(尹世冑), 조선혁명자연맹의 유자명(柳子明),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金星淑)이었고, 여기에 조선청년전위동맹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7당 통일회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전위동맹의 최창익(崔昌益) 등 18명이 통합회의와 관련없이 옌안(延安)으로 떠났고, 이로 인해 모든 단체를 해체하고 개인본위로 새로운 통합단체를 결성한다는 7당 통일회의 원칙을 실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단체본위 통합을 주장하던 김성숙과 함께 퇴장하였고, 이로써 7당 통합은 무산되었다. 7당 통일회의 뒤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병력이 모여 있는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으로 가서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합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어 1941년 충칭(重慶)에서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를 조직하여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본부 세력이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편입될 때 임시정부에 합류한 것이다. 같은 해 6월,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43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잠행관제」에 의해 설치된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엄항섭·유림(柳林)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4년 5월 임시정부 연립내각 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12월 1일, 홍진·조소앙 등과 함께 임정요인의 제2차 환국 때 귀국하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임시정부 내무부장으로 김구 주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하였다. 1946년에는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자유신문(自由新聞)』을 발행하였다. 1948년 5월 제헌의원 선거에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초대 국회 부의장과 이승만(李承晩)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하였다. 특히 1956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하여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기위한 활동 중 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용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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