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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柄燮

柄燮

1890. 8. 21 ~ 1934.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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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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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固城)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고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조선국민회
  • · 혈성단
  • · 통영청년단
  • · 조선청년회연합회
  • · 조선교육개선회
  • · 조선노농총연맹
  • · 마산노농동우회
  • · 마산노동회
  • · 신간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90년 8월 21일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 철성면(鐵城面) 성내리(城內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는 여해(呂海)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자료의 한계로 자세한 성장 배경과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1917년 3월, 미국에서 국민회(國民會)와 연계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전민족 결사로서 독립전쟁에 나서기 위해 평양(平壤)에서 조직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의 경상도 지부 구역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조선국민회 조직이 발각되면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경상남도 진주(晋州)의 기독교 계열 학교인 광림학교(光林學校) 교사로 근무하던 중, 홍수원(洪秀瑗)을 단장으로 하는 혈성단(血誠團)에 참여하였다. 혈성단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혈성단의 활동은 얼마 못가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0년에 들어와서는 경남 일대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경남 일대 청년회 설립에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사의 통영분국장·마산지국장 등을 지내며 폭넓은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4월 초 통영청년단 부단장을 맡았으며, 그 해 8월에는 총무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김길창(金吉昌)·이윤재(李允宰)·이약신(李約信) 등과 함께 경남지역 기독교 남녀청년단체 연합단체인 경남기독청년전도단(慶南基督靑年傳道團)을 창설하고, 경사교부장을 역임하였다. 이 밖에 마산기독교청년면려회(馬山基督敎靑年勉勵會), 경남주일학교진흥회(慶南主日學校振興會) 등 기독교 청년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20년 12월 서울 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열린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창립총회에서 마산구락부 대표로 참석하여 의사(議事)로 선출되었고, 1922년 4월 3일에는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1921년 5월에는 학교 입학을 거절당한 학생들을 위해 마산구락부에서 임시로 설치한 교육기관인 마산학원의 학감을 맡기도 하였다. 각종 청년회와 노동야학회에서 강연을 통해 청년의식 계몽에 힘쓰기도 하였다. 1920년 4월 22일 경남거제군기성청년회(慶南巨濟郡岐城靑年會)에서는 「아(我) 반도 청년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강연 하였으며, 1921년 4월 16일 마산구락부(마산청년회)에서 「교육의 급무(急務)」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그리고 1921년 10월 8일 조선청년연합회가 진동(鎭東)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현 조선청년의 향로(向路)」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학업 기관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 공립보통학교 및 야학교 설립과 운영에 힘썼다. 또한 한국인 교육 개선을 목적으로 1921년 4월 6일 박사직(朴思穆)·김병규(金秉圭)·조종구(趙鍾九)·장덕수(張德秀) 등 70여 명과 함께 조선교육개선회(朝鮮敎育改善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3월에는 마산 물산장려회에서 「우리의 살 길은」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이 무렵부터 노농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어 1923년 3월 마산노농동우회(馬山勞農同友會) 집행위원장 겸 서무부 주임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10일 창원(昌原)에서 구산소작조합(龜山小作組合)이 창립될 때 「소작조합의 필요와 농촌의 진흥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7월에는 마산무산소년단(馬山無産少年團) 고문을 맡았으며, 사상단체 혜성사(彗星社)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되면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5년 9월에는 장재윤(張在輪)·팽삼진(彭三辰)·이봉수(李鳳秀)·박연수(朴連守) 등과 함께 마산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25년 10월 마산형평청년위원회(馬山衡平靑年委員會) 교육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6년 4월에는 마산 형평사의 사교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5월 마산노동회(馬山勞動會)에서 발간한 벽신문(壁新聞) 『첫소리』의 논설부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10월 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1월 마산의 12개 사회단체 연합 간담회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3월 2일 마산 12단체 대표자 간담회에서 임시의장으로 뽑혔다. 간담회에서 마산에 신간회(新幹會) 지부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자, 신간회 마산지부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7월 20일 설립된 신간회 마산지회에서 서기와 상무간사를 맡았으며, 1929년 6월 열린 신간회 복대표대회(複代表大會)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30년 3월 신간회 마산지회의 서기장 겸 서무부장이 되어 신간회 마산지회의 실질적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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