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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조

宋秉祚

1877. 12. 25 ~ 1942.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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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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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용천(龍川)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용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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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국민총회
  • · 대한민국임시정부
  • · 한중호조사
  • · 흥사단
  • · 대한적십자
  • · 대한교민단
  • · 임시의정원
  • · 한국독립당
  • · 한국국민당
  • ·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77년 12월 25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양하면(陽下面) 중흥동(中興洞)에서 송재홍(宋再弘)의 3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12월 23일로 알려져 있으나, 흥사단 입단 이력서와 1937년 12월 25일이 환갑이라는 『한민』 제11호에 따랐다.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신암(新岩)이고 이명은 영석(永錫)이다. 어려서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한때 상업에 종사하다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민족의식이 크게 성장하였다. 평양신학교 입학시기는 정확하지 않은데 1910년으로 추정되며 1914년 졸업 이후 목사가 되어 고향 인근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용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 해 10월 2일 대한국민총회(大韓國民總會) 평의원에 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선전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집 등을 추진하였다. 대한국민총회는 1919년 8월 평양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본부로서 각지에 조직된 지부인 향촌회, 군부회(郡府會)를 총괄하였다.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활동 근거지를 중국 안둥(安東, 현 단둥)으로 옮겼다. 1919년 10월 20일 안둥에서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參事)에 임명되어 국내에서 임시정부로 전달되는 독립운동 자금을 관리하였다. 1920년 4월에는 임시공채관리국 공채모집위원에 임명되어 평북 신의주(新義州)와 고향인 용천군을 담당하며 임시정부의 재정 확충에 힘썼다. 이어 1920년 5월에는 임시정부의 지방선전부 선전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국내와 상하이(上海)간 선전대원의 접촉 연계와 선전물 홍보 활동을 담당하였다.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운영하던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의 도움으로 안둥에서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는데, 쇼가 1920년 7월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곤란을 겪게 되었고 상하이로 피신하였다. 상하이로 이동하여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 단원이 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가입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1921년 3월에는 손정도(孫貞道)·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여 국내외 각 교회에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독립 지원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보냈다. 같은 해 4월에는 한중 양 국민의 친선과 대일 공동항쟁을 목적으로 하는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설립하여 윤기섭(尹琦燮)·김홍서(金弘敍)·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밖에도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 기독교인이 설립한 삼일당교회를 지휘하고,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의사원에 당선되는가 하면 그해 12월에 열린 대한적십자 총회에서 회장 안창호(安昌浩)에 이어 감사에 선임되는 등 상하이 교민의 친목과 권익 보호에도 앞장섰다. 1921년 들어 내부 개혁의 실패와 알력으로 영향력이 크게 약화된 임시정부의 개혁을 위해 국민대표회 소집론을 제기하며 이에 적극 나섰다. 같은 해 5월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최고기관과 방략을 논의하고자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소집을 촉구하는 연설회를 열었고 이어 이탁(李鐸)·차리석(車利錫)·남형우(南亨祐)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기성회의 조직위원에 선출되어 국민대표회 소집 준비에 나섰다. 국민대표회는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상하이에서 열렸다. 신한청년단 대표로 참여하여 안창호·윤해(尹海)·신숙(申肅) 등과 함께 부의장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고, 과거문제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였다. 국민대표회는 임시정부의 개편 문제를 두고 개조파와 창조파 그리고 정부옹호파의 대립이 심해지는 가운데 1923년 5월 이후 창조파가 일방적 활동을 함으로써 결국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에 독립운동 단체들은 그 해 6월 3일 “국민대표회의 명의를 절취 농간하여 전민족의 의지에 반대하여 독립운동의 전도에 지장이 되는 행위를 감행한 것”이라며 창조파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신한청년단 대표로 여기에 참여하였다. 한편 1924년 5월에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 원서를 제출하였고, 그 해 11월 15일 안창호의 문답에 통과하여 흥사단 단우가 되어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이끌어갔다. 국민대표회가 결렬된 뒤 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정국쇄신 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1925년 2월에 열린 제1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사면한 여운형을 대신하여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안창호, 조상섭(趙尙燮) 등과 함께 임시정부경제후원회(臨時政府經濟後援會)를 조직하여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임시정부의 재정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같은 해 8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11월 22일 물러날 때까지 임시정부 개혁에 힘썼다. 이 무렵 중국 관내를 중심으로 한 민족유일당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나섰다. 1926년 7월 8일 한진교(韓鎭敎)·김보연(金甫淵) 등과 함께 상하이 삼일당에서 연설회를 개최하여 국내에서 일고 있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전 민중을 지도할 일대혁명당 조직을 주장했고, 같은 달 16일에는 김규식(金奎植)·이유필(李裕弼) 등과 함께 6·10만세운동에 관한 연설회를 열고 민주, 공산 양진영의 민족협동전선론을 주장하였다. 민족유일당 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1927년 3월 결성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의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유일당 건설에 앞장섰다. 이후 민족유일당 운동은 급속히 진전되어 그 해 11월에는 베이징(北京)·상하이·광둥(廣東)·우한(武漢)·난징(南京)의 촉진회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관내 촉성회연합회로 결실을 보았다.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의 반공쿠데타 이후 중국 관내 정세가 급속히 변화하고 또한 그 해 12월 코민테른이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를 선언하면서 민족, 공산 양진영의 대립이 격화되자 결국 민족유일당 운동도 실패로 일단락되었다. 이 운동은 실패했지만 1930년 1월 이동녕(李東寧), 안창호 등과 함께 종래의 지방적 파벌을 청산하고 민족주의 운동전선을 통일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이후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 기초 세력이자 여당의 역할을 자임하였다. 1931년 7월 일제가 한·중간 이간정책의 일환으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을 조작하고 이어 그 해 9월에는 만주를 침략하면서 중국 내에서 반만항일운동이 급격히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여 한인기독교회 대표로 흥사단·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소년척후대 등과 협의하여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를 결성하고 일제가 조작한 만보산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반만항일을 위한 한중 연대에 적극 나섰다. 1931년 10월에는 대한교민단 임시모연위원회(臨時募捐委員會) 위원이 되어 대한교민단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노력하였다. 한편 1932년 3월 흥사단이 자활과 자립을 목적으로 안창호를 이사장으로 하는 공평사(公平社)를 조직하자 엄항섭(嚴恒燮), 선우혁(鮮于爀)과 함께 감사에 선출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거 직후 안창호가 붙잡혀서 국내로 이송되면서 6월에 흥사단 원동위원부 위원장 대리를 맡아 흥사단을 이끌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직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저장성(折江省) 항저우(杭州)에 임시판공처를 정하고 옮겼다. 이때 한국독립당 이사장으로 선임되어 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내 반일기운이 높아지면서 관내 항일단체의 전선통일이 요구되자 그 해 11월 이유필, 김두봉(金枓奉)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의열단(義烈團)·한국광복동지회의 대표들과 협의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였다. 1933년 3월에 열린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에 선임되어 재무장을 맡았고, 6월에는 국무위원회 주석에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이끌어갔다. 한편 같은 해 4월에는 대한교민단이 정무위원회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정무위원장에 임명되어 윤봉길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물론 한국독립당, 대한교민단 그리고 흥사단을 이끌며 1인 3, 4역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1934년 이후 통일동맹이 임시정부의 폐지를 주장하며 단일당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건설을 추진함에 따라 한국독립당의 조소앙(趙素昻)·김두봉 등이 단일당 참가를 결정하자, 이에 임시정부 폐지를 반대하던 조완구(趙琬九)·차리석(車利錫)등과 함께 단일당 참여를 반대하며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임시정부 사수를 고수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의 결성과 함께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7명 가운데 5명이 사임하면서 임시정부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차리석 등과 함께 임시정부 재건에 노력하였다. 한국독립당 광둥지부장 김붕준(金朋濬) 등과 연락하는 한편 이시영(李始榮)·조완구 등을 매개로 이동녕을 통해 김구(金九)와 제휴하여 1935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고 김구·이동녕·이시영·조완구를 새로 국무위원으로 선출하고 이동녕을 국무회의 주석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재건하고 재무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1월 말에는 김구와 함께 민족혁명당에 대응하여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결성하고 이사장 김구에 이어 이동녕 등과 함께 이사에 선임되었다. 1937년 8월에는 난징에서 한국광복운동 자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중국 관내 민족전선 우파계열을 통일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난징을 침략하면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정착하기까지 항저우를 떠나 자싱(嘉興)에서 전장(鎭江)·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치장(棊江) 등지로 고난의 대장정을 이어갔다. 1939년 10월 치장에서 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3당 합당의 결의를 이끌었고, 그 뒤 6년간 재임한 임시의정원 의장을 사임하고 10월 23일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 11인 가운데 1인으로 재선임되어 1940년 10월 9일까지 무임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5월 9일 3당 통합 창립대회를 개최하여 한국독립당이 정식 출범하면서 중앙감찰위원에 임명되었다. 한편 상하이 흥사단의 장덕로(張德櫓)·선우혁(鮮于赫) 등이 일제의 탄압과 회유를 견디지 못하고 흥사단원동위원부 해소를 성명하자 차리석·김붕준 등과 함께 해소 성명을 부인하고 원동위원부의 설치와 부활을 선언하였다.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긴 뒤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외교 교섭을 통해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창설에 기여했고, 9월 23일 국무회의에서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임명되었다. 1941년 10월에는 김붕준이 임시의정원 의장에서 탄핵되면서 다시 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1942년 2월 25일 상오 10시 충칭 시내 토교(土橋)에서 향년 67세로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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