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교일
安敎一1888. 6. 11 ~ 1950. 6.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애국단
- · 혈복단
- · 조선민족대동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대동단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1888년 6월 11일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퇴촌면(退村面) 오리(梧里)에서 안방열(安邦烈)과 김해 김씨(金海) (金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 참판공파이다. 전라남도 장성(長城)에서 지내다가 상경하여 서울 창신동(昌信洞)에서 기거하였다. 형조참의를 지내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측근이었던 안기영(安驥泳)이 조부다. 김앙지와 혼례하여 1남 1녀를, 후처 유상옥(용두리여학교 교사)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다. 서울에서 광무학교(光武學校)와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한 뒤 1912년부터 이화학당(梨花學堂) 부속 용두리여학교(龍頭里女學校)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4월 충청남도 논산(論山) 출신 신현구(申鉉九)를 단장으로 하는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이 결성되자 이에 본부 구성원으로 가담하였다. 1919년 11월 단장 신현구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본부의 활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고 조직이 와해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원(金泰源)과 동지 김교선(金敎善)·신봉균(申鳳均)·신상균(申相均)·이정방(李鼎邦) 등과 함께 종로구 5정목 김교선 집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혈복단(血復團)’을 결성하여 항일활동을 지속하고자 하였다. 1919년 3월 전협(全協)과 최익환(崔益煥) 등이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는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 결성되자 애국단 동지 김영철 등과 함께 가담하였다. 대동단에서는 10월 31일을 기해 박은식(朴殷植) 외 29인 명의로 된 「대한독립선언서」로써 ‘제2회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하고, 김가진과 의친왕(義親王)의 중국 상하이(上海) 망명 계획을 시도하였다. 같은 해 11월 20일 오후 4시경 배재학당 동창생 김일(金一)의 지시를 받아 『독립신문』 호외(號外) 약 50장을 정희종(鄭喜鍾)에게 인쇄하도록 전하였다. 11월 25일 오후 7~8시에 「대동단 선언(大同團宣言)」 10장을 다시 정희종에게 인쇄토록 하였다. 이 문건들을 김일에게 건네주었다. 이후 김일로부터 「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 40·50장을 배부 받은 뒤 종로 초교(初橋)와 동대문의 중간 도로상에서 강정희를 만나 전한 뒤, 정희종에게 11월 26일 밤에 모두 배포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같은 달 26일 밤 김교선 집에서 정희종에게 내일 자동차로 배포하라고 선언서 약 200장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단장 전협이 민족대표를 국내 인사로 새로 구성하자는 주장에 따라 그 인선 작업으로 인해 거사일이 연기되었고, 11월 1일 학생 동원 책임을 맡았던 민강(閔橿)과 강매(姜邁)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1월 10일에 결행한 ‘의친왕 망명 작전’이 국경 넘어 중국 안둥(安東)에서 발각되어 좌절되었고, 11월 19일에 전협이 붙잡혀 조직이 거의 와해되었다. 일제 경찰의 포위망을 피한 동지 나창헌(羅昌憲)·이신애(李信愛)·정규식(鄭奎植) 등과 거사일을 (음)10월 3일 개천절인 11월 25일로 변경했으나 계획이 지연되었고, 마침내 11월 28일 준비해 온 선언서를 살포하며 200여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대동단 활동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고, 1920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 예심 종결을 거쳐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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