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도
孫貞道1881. 7. 26 ~ 1931. 2. 1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가쓰라 다로(桂太郞) 암살모의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81년 7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오흥리(吳興里)에서 손형준(孫亨俊)과 오신도(吳信道)의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아호는 해석(海石), 자는 호건(浩乾)이다. 1888년 6살때부터 향리의 사숙(私塾)에서 17살이 될 때까지 한학(漢學)을 수학하며 관리의 길을 지망하였다. 1895년 같은 동리 박용(朴鏞)의 맏딸이며 두 살 연상인 박신일(朴信一)과 결혼하였다. 1902년 관리 임용시험에 응시할 생각으로 평양으로 가는 도중 평양 교외에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조 목사집에 유숙하며 그로부터 서구 문화와 기독교 교리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이는 신학문에 대한 동경과 기독교를 통한 새로운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상투를 자르고 관리가 되기를 포기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집에서 쫓겨났다. 이후 조 목사의 소개로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文約翰, John. Z. Moore)을 만났다. 문요한의 비서 겸 한국어 선생으로 있을 때 그의 추천으로 1903년에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아내 박신일도 평양 기홀(紀忽)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며 가정을 돌보았다. 1907년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에 입학했으나, 1908년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중퇴하였다. 1909년 6월에 진남포(鎭南浦)와 삼화구역의 전도사로 파송되어 사역하고 신흥리교회 담임을 맡았다. 1910년 5월 서울 정동(貞洞) 제일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청국파견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 해 7월에 중국어를 익힐 목적에서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갔다가 신민회(新民會) 일원으로 파견된 조성환(曺成煥)을 만났다. 1911년 봄 감리교 연회에 참석차 귀국해, 그 해 4월 『그리스도인 회보』에 투고한 「기독교인의 자신력(自信力)」이라는 글에서 “기독교인들은 남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력으로 행복을 향유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도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각 성도들 스스로의 믿음으로 발달해야 한다”라고, 기독교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자신감을 가질 것을 역설하였다. 또 국내 기독교 지도자들을 통해 입수한 소식을 미국의 안창호(安昌浩)에게 전하고 안창호와 조성환 등 해외에서 활동하는 지사들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1년 6월 미감리교연회에서 집사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베이징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2년 3월에 귀국해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 현 서울특별시 중구 남창동 소재)에서 개최된 미국감리회 연회에 참석해 선교활동을 보고하였다. 이어 다시 ‘청국(淸國)의 펑톈(奉天) 북방 하얼빈 남방 선교사’에 임명되었다. 하얼빈(哈爾濱)으로 파견되어 중국인과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교회를 개척해 200여 명의 교인들이 모였다. 모금과 강연, 설교와 노동 등을 통해 자력으로 비용을 마련해 이층예배당을 헌당했으며, 한국인을 위한 공동묘지까지 마련하는 열정으로 교회를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교회가 한인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어가자 하얼빈 일본총영사관과 조선총독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12년 7월 하얼빈에서 이른바 ‘가쓰라 다로(桂太郞) 암살모의사건’의 주모자라는 혐의로 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혔다. 3개월간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과 악형을 받았고, 한편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이른바 보안법조례위반으로 1년 유배형을 받고 전남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진도 주민들과 예배를 보고 성서를 가르치며 전도 활동을 펼쳤다. 유배 1년만인 1913년 11월 석방되었다. 1914년 6월 서울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동대문교회 목사로 파송되어 1년간 시무하였는데 신도들이 마당에 서서 예배를 드릴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915년 4월 현순(玄楯) 목사의 후임으로 정동제일교회로 발령을 받자 동대문교회 교인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이임을 극구 반대하는 등 교인들의 신임을 받았다. 새로 부임한 정동 제일교회에는 주로 이화학당(梨花學堂), 배재학당(培材學堂) 학생들이 예배에 참여하였다. 정동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 10년 만에 엡윗청년회를 재조직하여 활성화시켰다. 남자반과 여자반으로 갈라놓았던 휘장을 제거하였으며, 헌금으로 교회를 증축 수리하는 등 한국 최고의 교회로 발전시켰다. 1917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제5기로 졸업하고 1918년 6월 23일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9년 초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사람으로 서명하기로 했다가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義親王) 이강공(李堈公)을 출석시키는 일을 돕고자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입당하였다. 또 하란사(河蘭史)로 하여금 손병희(孫秉熙)를 설득해 민족대표 33인에 참여시키는데 도왔으며 천도교의 경비 지원도 이끌어냈다. 1919년 2월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에 망명을 결행해 3월 1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상하이에서 신규식(申圭植)·이광수(李光洙)·선우혁(鮮于赫)·김철(金澈) 등과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한 후 베이징으로 가서 의친왕 이강공과 하란사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시키고자 하였다. 이 일에는 감리교 목사들이 핵심 인물로 참여했는데, ‘입정(立丁)’이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였다. 석정(石丁)을 사용하는 현순(玄楯), 운정(雲丁)을 사용하는 최창식(崔昌植)과 서로 연락하였다. 그러나 하란사가 유행성 독감에 걸려 급사하는 변고가 생기면서 3월 26일 현순과 함께 상하이로 돌아왔다. 1919년 4월 10·11일 양일간 상하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의 한 회의장에서는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된 이동녕(李東寧)이 이틀 만에 사임하면서 4월 13일 제2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의 평정관(評定官)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를 조직하는데 필요한 자금으로 천도교로부터 1만원, 미국 선교부로부터 1만원을 얻었다. 1920년 1월 김립(金立)·김철(金徹)·김구(金九)·윤현진(尹顯振)·김순애(金淳愛)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경찰 조직인 의용단(義勇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그 해 2월에는 베이징에서 열린 ‘미국 감리 감독교회 동아시아 총회’에 현순과 함께 임시정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활동하는 감리교 선교사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의 상황을 알렸으며, 동양 평화의 관건은 ‘한국 독립’에 있음을 역설하였다. 총회에 함께 참가한 배형식(裵亨湜) 목사로부터 건네받은 1천여 원의 자금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을 초빙해 한국의 정황을 알리고 독립운동 선전활동 등의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와 신뢰를 쌓았고 1920년 6월 10일 흥사단 원동위원부(興士團 遠東委員部)에 입단하였다. 1920년 12월 29·30일 개최된 흥사단 원동대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1921년 3월 상하이에서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김인전(金仁全)·조상섭(曺相燮)·송병조(宋秉祚)·장덕로(張德櫓) 등 독립운동가인 기독교 목사들과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들은 중국 각 교회에 한국 교회의 참상을 전했으며 국제 사회에 한국 독립을 선전하고 특히 기독교인들로부터 한국의 독립에 대한 동정과 원조를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1921년 8월에는 임시정부의 교통총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2월에는 대한적십자회 회장에 임명되었다. 이어 같은 해 10월에 김구·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설하고 열린 제1차 이사회에서 노공부장(勞工部長)에 선임되었다. 상하이 한인교회 상의회(常義會) 위원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임시정부의 공립학교인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이 되어 학교 운영을 맡기도 하였다. 1923년 1월 독립운동의 최고기관과 방략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이탁(李鐸)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했으며 재정위원에 선임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다시 목회자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1924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된 미감리회 연회에 참석하여 만주 지린성(吉林省)의 신첩(新帖)교회 목사로 부임이 결정되었다. 당시 지린성 액목현(額穆縣)교회 담임을 겸하여 지린성 주변의 대분(大坌)과 대강자(大崗子) 교회를 순방하며 목회 활동을 펼쳤다. 설교를 통해 단결과 협력·도리·정직·애정·선·근면 등의 가치와 ‘독립에 대한 가능성 제시’를 비롯하여 ‘시련의 극복’, ‘과학적 사고의 제창’, ‘경험의 극대화’, ‘남의 탓 지양’ 등에 대해 설교하여 교인들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또 중국 관청에 드나들며 한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 줌으로써 교회는 한인 동포들의 안식처이자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1926년 길림교회에서 3·1운동 7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만주를 순회 중이던 안창호가 교회를 방문해 ‘조선독립운동’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1927년 2월 안창호가 다시 지린 한인사회를 방문하였을 때 대동문 밖 최명식(崔明植)의 대동공사(대동공사)에서 ‘조선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4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붙잡히는 일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지린성 교섭국 통역관인 오인화(吳仁華)와 함께 지린성 당국자는 물론 베이징에 있는 장쉐량(張學良)측과 교섭을 진행해 20여 일 만에 붙잡힌 동지들을 석방시켰다. 1927년 4월 1일에 ‘길림사건’의 현장인 대동공사에서 안창호를 비롯한 재만 한인 지도자들과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였다. 농민호조사는 재만 한인의 경제 자립과 독립운동 기지의 견실화, 이상촌 건설 등을 목표로 여러 사업을 벌였다. 같은 해 고향의 전 재산을 처분해 동생 손경도(孫敬道) 명의로 경박호(鏡泊湖) 일대 액목현(額穆縣) 지역에 3천일경(120결) 정도의 땅을 매입하여 이상촌을 건설하였다. 목릉(穆陵)에도 3천평의 농장을 개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연일 과로와 격무에 시달렸고 ‘가쓰라 암살모의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렸다. 1930년 봄 이후에는 목회가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1931년 2월 베이징에 있는 가족을 만나고 지린으로 돌아온 후, 한 동포의 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액목현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동양의원에 입원했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2월 19일에 사망하였다. 그 해 2월 22일에 거행된 장례식에는 베이징에서 온 아내 박신일과 친동생 손경도(孫敬道) 그리고 한인 동포 40여 명이 참석했으며 일제의 경계 속에 조촐하게 치러졌다. 사망한 후 10개월이 지나도록 시신은 지린성 동문 밖 임시 장지에 봉안되었다가 9월에 이르러서야 지린성 북문 밖 북산(北山)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명화⋮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