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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풍

徐基澧

1880. 4. 13 ~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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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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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평양(平壤)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평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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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105인 사건
  • · 1919년 평양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1880년 4월 13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수옥리(水玉里)에서 태어났다. 서기풍(徐基豊)이라고도 불렀다. 기독교 장로회 신자로 1904년 7월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09년 1월 30일에 귀국하였다. 191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선건환(鮮乾桓)과 협의하여 평양 대동문(大同門) 거리에 한미상회를 열었다. 이 회사의 목적은 표면상으로 서양잡화의 매매 또는 소주를 만들어 재미 한인에게 보내 판매하는 것으로 했으나, 한미무역주식회사 평양대리점 대리인으로 근무하면서 신민회(新民會) 평양지부 일반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 이른바 105인사건의 피의자로 구속되었다. 105인사건은 일제가 한국강점 직후 국내 민족운동 세력을 제거시킬 의도에서 날조한 탄압 사건이다. 이 사건을 105인사건이라 칭함은 여기에 연루되었던 700여 명의 인사 가운데 제1심에서 유죄를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기 때문이다. 신민회 인사들이 다수 연루되었기 때문에 신민회사건이라고도 한다.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혔던 인사 122명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1912년 9월 28일 1심 공판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1913년 3월 경성복심법원 2심 공판에서 무죄를 받아 석방되었다. 풀려난 후 양말공장을 운영하면서 평양의 채관리교회(釵寬里敎會)에서 감리교 권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일 평양부 남산현(南山峴)교회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혔다. 1919년 6월 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당하였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1927년에는 동아일보 진남포(鎭南浦)지국 광양분국(廣梁分局) 분국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37년부터는 기독교 조선감리회(朝鮮監理會) 대표를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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