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63. 7. 9 ~ 1910.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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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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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1863년 7월 9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칠성면(七星面) 율원리(栗院里)에서 안우량(安友良)과 옥구 장씨(沃溝 張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자는 공위(公威)·공우(公雨)·윤옹(允雍), 호는 위당(韋堂)·동주(東洲)·금파(錦坡)이고, 초명은 필(泌)이며 이명은 종설(鍾卨)이다. 파주 교하에 집안 대대로 거주하다가 조부인 안정두(安廷斗) 때 괴산으로 이거하였다. 자신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였으나, 『광무양안(光武量案)』에 기록된 토지는 26필지에 37,061척 2,369결(12,127평)로 상당한 지주층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특별한 관직 없이 서울을 왕래하고 양반의 체모를 유지하며 친구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어려서 고향에서 한학 수학에 매진하였고, 1874년 향리에서 경주 김씨와 결혼하였다. 1894년 생원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1896년 인척 관계였던 이상설(李相卨)의 추천으로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 1907년에는 세무관의 추천으로 탁지부(度支部) 대신에 의해 지방위원회(地方委員會) 충주(忠州) 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벼슬살이와 입신양명을 바랐으나 이렇다 할 관직생활은 하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와 홍문관 수찬과 사헌부 장령을 지낸 조우희(趙宇熙)에게서 수학하였고, 민영환(閔泳煥)의 문하에 10여 년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21세 때인 1883년 봄에 저술한 「제한산서옥(題閑山書屋)」으로부터 1907년의 「영갈(詠蝎)」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세서와 책론을 비롯하여 『위당수초(韋堂隨艸)』 등의 시문집을 저술하였다. 이 가운데 일부가 별도의 시문집으로 정리되어 『위당유고(韋堂遺稿)』로 발간되었다. 1892년 「문형(問形)」을 저술하였는데 공자의 정통을 흠모하고 주자의 훈계를 아름다워 한다고 하며 정통 주자학자로서 본인의 신념을 확인하였다. 특히 노중련(魯仲連)의 원대한 뜻과 굴원(屈原)의 뜻을 잇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급제하던 해에 저술한 『요산(要算)』은 편오제(編伍制)를 중심으로 한 자강책을 논의한 것으로 그의 경세론의 중심을 이루는 방법론이다. 1895년에 저술한 「비유자문답(非有子問答)」은 한말의 혼란한 시기를 살았던 유학자의 의식지향을 잘 보여주는 문답체 우언으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글은 “사람을 얻는 것(得人), 백성을 화합하게 하는 것(和民), 집정하는 요령(執政要領), 입법·행정·사법의 삼대권리” 등을 논한 것이다. 이는 실학으로부터 배태되고 개화로 나아가는 사상적 발전을 보여주며, 이러한 경세론은 바탕을 전통사회에 두면서도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서 혁신적인 개혁안을 포함하고 있다. 이른바 동도서기론의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해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사건을 서울에서 내려온 친척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만사 5수를 지어 비통한 마음과 울분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1905년에는 민영환이 을사늑약에 분개하며 자결하자, 그의 우국 충정을 칭송하는 제문을 남기며 추모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자 괴산의 집 옆에 있는 오랑강(五浪江)에 투신하여 자결 순국을 결행하였다. 망국을 책임져야 할 위치는 아니더라도 망국의 책임은 관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비에게도 있는 것이라 주장하며, 의리상 자결하며 절의의 뜻을 세울 것을 굽히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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