沈富潤
富潤1905. 2. 25 ~ 1951. 4.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삼척군청년동맹
- · 삼척노농공작위원회
- · 조선청년총동맹 강원청년연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2)
관련 사건
- · 삼척군 삼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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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2) 1905년 2월 25일 강원도 삼척군(三陟郡) 근덕면(近德面) 동막리(東幕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심수섭(沈水燮)·심상탁(沈象鐸)이며,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청송부윤(靑松富潤)이라는 창씨명을 쓰기도 하였다. 1923년 3월 동막리에 위치한 삼척공립보통학교(三陟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고, 이후 부산제2상업학교(釜山公立第二商業學校)와 평양(平壤)의 숭인상업학교(崇仁商業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4월 14일 삼척공립보통학교 2학년생 김달하(金達河)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자, 오원모(吳元模) 등과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5일 전교생들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교사 김기덕(金基德)의 지원을 받아, 학생들을 이끌고 삼척면 읍내로 나가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 헌병대의 출동으로 만세운동이 무자비하게 진압되면서 붙잡혔으나, 곧 훈계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24년 10월 14일 당시 재학 중인 부산공립제2상업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이 동맹휴학은 일제의 민족차별과 독립에 대한 열망에서 기인하였다. 1923년 일본인이 운영하는 부산상업번수학교의 명칭이 부산공립상업학교로, 부산공립상업학교가 부산진상업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이때 한국인 학생들은 일본인에게 학교의 이름을 빼앗긴 것으로 판단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했던 것이다. 3학년생이 중심이 된 동맹휴학으로 퇴학당한 선배들에 동조하여 2학년 동급생 정상우(鄭相右)·유종석(柳宗奭) 등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하였다. 1925년 5월 평양에 소재한 사립 숭인학교 2학년생으로 편입하였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삼척으로 내려왔다. 1927년 8월부터 조선일보 삼척지국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경 삼척지국의 기자인 정건화(鄭建和)와 함께 사회주의사상 보급을 통해서 한국의 독립을 달성할 목적으로 삼척군청년동맹(三陟郡靑年同盟)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신간회(新幹會) 삼척지회를 조직하였다. 1928년 5월경 강원도 철원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던 첩보를 감지한 일제 경찰이 강원 일대 사회주의자들을 대거 검거하였을 때, 양양청년동맹 및 신간회 양양지회 간부들과 함께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1930년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원주에서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 강원청년연맹(朝鮮靑年總同盟江原靑年聯盟) 제3회 대회에서는 검사위원장으로 선출되는 등 청년동맹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31년 5월 삼척군 청년동맹 간부 이상인(李尙寅)·박내빈(朴來賓)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 삼척지국 사무실에서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한국의 독립과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위해 노동 및 농민조합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10월말 경 김덕환·황운대(黃雲大) 등과 함께 적색노동조합(赤色勞動組合)을 조직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각리(各里)에 조합반(組合班)을 결성하고 이를 지도하기 위해 K회(會)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이때 비서부와 조직연락부 등의 부서를 두고, 교수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한편 1931년 5월 면협의회에서는 삼척군 근덕면과 호곡면(芦谷面) 사이의 도로공사를 시행하면서 발생하는 비용과 부역을 면민(面民)에게 부과한다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면민들이 크게 반발하자, 청년동맹 및 K회 관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11월 26일까지 수차례에 걸쳐서 그 실행방법을 협의하였는데, 11월 10일경 이상인 등과 함께 삼척면 정상리(汀上里) 산중에서 K회 회합을 가졌다. 계속해서 협의를 진행한 결과, 11월 30일 장날에 맞춰서 교가(交柯)시장에서 도로공사 면민대회를 개최하고 부역과 도로공사 비용 대납 반대운동을 결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11월 30일 오전 10시 직접 작성한 도로공사 반대 결의문을 최근섭 등에게 주며, 면민들이 잘 보이는 장소에 붙일 것을 지시하였다. 삼척경찰소 근덕경찰관주재소에서 면민대회를 허가해주지 않자, 12시 50분경 “도로공사 부역 및 대납금 절대반대”라고 적혀 있는 깃발을 내걸고, 시장에서 면민대회를 개최하였다. 면민대회에서 “면민 각자가 받은 납입고지서를 면사무소에 투기(投棄)하자”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면민들과 함께 부역대납금 불납동맹 만세를 부르며 근덕면사무소를 찾아갔다. 이 소식을 접한 경찰관들이 면사무소 진입을 제지하였으나, 일제의 만행에 성난 면민들이 거침없이 납입고지서를 면사무소에 던지며 항거하였다. 시위를 함께 준비한 이상인 등과 함께 근덕면장 신종건(辛鍾健)에게 도로공사 중단을 요구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되어 1932년 3월 3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주거 침입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32년 6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가 취하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1933년 7월 24일 정석대·박내등 등과 함께 삼척군 삼척면 오분리(梧粉里) 해안가에서 적색노동조합의 지도기관으로 삼척노농공작위원회(三陟勞農工作委員會)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위원회는 농민부와 노동부로 구성하기로 했으며, 중앙부 책임자가 되어 각면에 농민과 노동조합 조직을 지도하였다. 이 ‘삼척적농사건’으로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35년 10월 3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과 주거 침입죄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었으나 1936년 12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대로 형이 확정(원심미결구류일수 중 300일 및 당심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에도 보호관찰대상으로 감시를 받다가, 1941년 2월 17일 보호관찰이 해제되었다. 하지만 1941년 5월경 전쟁반대 관련 투서나 언동을 감행하다가 다시 붙잡혔고, 1941년 9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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