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문
申相文1882. 3. 20 ~ 1958. 5.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덕군 영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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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2년 3월 20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인량동(仁良洞)에서 신덕영(申德泳)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여욱(汝郁), 호는 단산(丹山), 이명은 신상순(申相淳)이다.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고 농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2일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까지 갔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영덕군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平洞)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의 권유와 기독교도 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권상호(權相浩)·박희락(朴羲洛) 등이 3월 18일 영해면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1919년 3월 18일 남응하(南應夏)·박동활(朴東活)·김탁이(金卓伊) 등과 함께 영해면 장날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군중과 함께 영해경찰관주재소 주임순사 스즈끼(鈴木鶴次郞)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 등을 구타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 영해공립보통학교 훈도 배병렬(裵秉烈)과 학생들에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을 선도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 기구인 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면사무소·영해우편소 등의 건물과 집기, 각종 서류를 파괴하였다. 만세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영해경찰서 서장 시게(茂義孫)를 비롯한 순사와 순사보 등 4명을 다시 구타하고, 본서로 돌아가는 이들을 추격하여 폭행하였다. 다음날인 3월 19일에도 아침부터 지역민 7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19일 오전 11시경 영덕경찰서의 응원 요청을 받은 포항헌병분대 분대장이 일제 헌병 6명을 이끌고 영해에 도착하였으며, 오후 5시경에는 대구 주둔 보병 80연대 소속 일본군 장교 이하 17명이 영해에 왔다. 일제 군경은 강압적으로 해산을 종용하다가 시위 군중이 해산을 거부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공포탄을 발사하였고, 곧이어 실탄을 발포하며 무력 진압을 자행하였다. 일제 군경의 발포로 임창목(林昌穆) 등 8명이 사망하고, 남효량(南孝樑) 등 16명이 부상당하였다. 일제 군경은 영덕을 비롯한 영해·병곡·창수·지품·남정면 일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인 체포 작전에 들어갔다. ‘제1차 체포 작전’으로 김세영 등 17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제2차 체포 작전’으로 남응하 등 74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일제 군경의 제2차 작전에서 남응하·남교문·김탁이·박동활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이후 이른바 소요죄, 공무 집행 방해죄, 건조물 및 기물 손괴죄, 공문서 훼기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같은 해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그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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