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훈익
宋勳翼1884. 9. 22 ~ 1961. 2. 2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유림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파리장서운동
- · 성주군 성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4년 9월 22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초전면(草田面) 고산동(高山洞)에서 송인섭(宋寅燮)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야성(冶城)이며, 자는 성방(聖放)이다. 일찍이 족친인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15세에 학업을 중단하였다. 성품이 순후(淳厚)하고 근면하였으며, 체력이 뛰어나 장사로 소문이 났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뒤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파리장서운동)을 주도했던 송준필을 후원하였다. 유림단의 「독립청원서」를 휴대하고 김창숙(金昌淑)이 상하이(上海)로 떠난 뒤, 3월 29일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 야성 송씨 종실(宗室) 백세각(百世閣)에서 송준필이 제작한 「국내통고문(國內通告文)」을 각처로 배포하였다. “현재의 상황 아래서는 독립운동에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므로, 4월 2일 성주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양반 유생들의 뜻을 표시하자”라고 결의하고 4월 2일 성주면 읍내 장날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송우근(宋祐根)·장석영(張錫英)·송규선(宋圭善)·김희규(金熙圭)·이봉희(李鳳熙)·송문근(宋文根)·송천흠(宋千欽) 등과 함께 군내의 유력한 양반 유생들에게 이를 통고하였다. 4월 2일 오후 1시 성주면 경산동(京山洞)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성주면 읍내시장(경산동시장)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호응하여 시장 중앙에 모였던 유림 측 인사들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제 경찰이 주도 인물 몇 명을 경찰서로 연행하자, 군중의 분노는 한층 높아갔다. 경찰서 남쪽 군청 앞과 그 양쪽 길에 700~800명, 동쪽 우체국 앞 시장 통로에 약 1,500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일제 경찰이 발포하자 군중은 일시 물러났다. 서북쪽 산 위에 다시 모여 불을 피워 놓고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밤 10시경 해산하였다. 이날 만세시위에서 일제 경찰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와 성명 미상의 2명이 현장에서 총을 맞고 사망하였으며, 이봉희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일로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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