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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화

朴鎭和

1885. 7. 7 ~ 1941.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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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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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牙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아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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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8)

관련 사건

  • · 아산군 신창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8) 1885년 7월 7일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 선장면(仙掌面) 신성리(新聖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산군 신창면(新昌面) 읍내리(邑內里)로 이사하여 인력거꾼(人力車夫)으로 생활하였다. 이명으로 박칠동(朴七童)·박진화(朴秦和)·박태화(朴泰和) 등을 사용하였다. 1919년 4월 아산군 신창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아산지역 만세운동은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른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3월 14일에는 온양장터에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가 뿌려지면서 공립보통학교 학생 100여 명과 장터에 모인 군중이 함께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신창면에서는 박민성(朴敏成)이 3월 18일 오후 1시쯤 신창시장에서 조명원(趙溟元)과 이상균(李祥均)을 만나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하였고, 공립보통학교 학생 김안기(金安基)에게도 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였다. 4월 1일 밤 8시 탕정면(湯井面)·염치면(鹽峙面)·배방면(排芳面)·온양읍(溫陽邑)·둔포면(屯浦面) 등의 면내 각 마을의 산 위에서 횃불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신창면 만세시위도 이런 군내 만세운동의 연속선상에서 발생하였다. 신창면 만세시위는 4월 2일 야간에 시작되었다. 오후 8시경 이덕균(李悳均)·정윤흥(鄭允興)·김양순(金良順) 등과 함께 읍내리와 오목리(五木里) 주민 약 200명을 이끌고 학성산(鶴城山)에 올라가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이때 “관청을 파괴하자”라는 이덕균의 주장에 호응한 군중들과 함께 돌을 주워 학성산을 내려왔다. 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로 가서 정윤흥 등의 주도하에 돌을 던져 문 2짝을 파괴하였다. 밤 9시경 100여 명의 군중은 일본 헌병주재소로 이동하였고, 그 가운데 15명은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돌을 던져 문등(門燈) 유리를 깨뜨렸다. 이어서 밤 10시경 강순화(姜順和)·손천일(孫千日) 등 40~50명과 함께 신창공립보통학교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학교장 무나카타 다카시(宗方喬)가 나와서 만세를 부르지 못하게 제지하여 시비가 일어났다. 이때 선두에서 시위 군중과 함께 학교 건물을 향하여 돌을 던져 유리창과 문을 파손시켰다. 일제 헌병대에서는 헌병 7명과 보병 3명을 출동시켜 총을 발포하며 군중을 해산시키고 15명을 체포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5월 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자신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따른 의사 발동이며 범죄가 아님에도 제1심 및 제2심이 언도한 유죄판결은 부당하며 복종할 수 없는 위법”이라고 주장하며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9월 6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여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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