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목
朴枝穆1878. 6. 28 ~ 1939. 5.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의령군 의령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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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3) 1878년 6월 28일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지정면(芝正面) 두곡리(杜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의령군 의령면 읍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의령면 읍내 만세시위는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구여순은 고향으로 돌아와 곧바로 최정학(崔正學)을 비롯한 읍내 인사들과 회합하고 읍내 장날인 3월 14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14일 읍내 의령향교 앞에서 구여순 등이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때 현장에서 군중과 함께 연설에 적극 호응하였다. 연설이 끝난 후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고, 군중과 함께 읍내 장터와 중심가를 행진하였다. 3,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를 이끌고 일제 식민지 억압의 상징인 경찰관 주재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3월 15일에도 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비가 내렸지만 읍내에는 1,500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 전날과 같은 방식으로 의령향교 앞에서 최정학 등이 독립의 당위성과 시위 참가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맹렬하게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대를 지휘하여 읍내 중심가를 행진하였다. 연일 만세시위가 대규모로 전개되자, 일제 군경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폭압적인 강제 해산과 주도자 체포에 나섰다. 마산의 일본군 포병대까지 급파되어 총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한 진압에 가세하였다. 이에 분노한 군중을 지휘하여 3월 16일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 군경의 대대적인 주도자 검거를 피해 갈 수 없었다. 군내에서 함께 검거된 인원만 100명이 넘었다. 고문을 동반한 가혹한 취조를 받다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즉시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그해 6월 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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