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
宋鎭禹1890. 5. 8 ~ 1945. 12.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재일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 · 중앙학교
- · 동아일보
- · 신간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0년 5월 8일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수북면(水北面) 남산리(南山里)에서 아버지 송훈(宋壎)과 어머니 양씨 사이에서 4남4녀 중 다섯째(4남)로 태어났다. 본관은 신평(新平)이며, 호는 고하(古下), 초명은 옥윤(玉潤)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1896년 전남 장성에서 봉기하였던 의병장 기삼연(奇三衍)이 집으로 잠시 피신 온 것이 인연이 되어 기삼연에게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의 유학을 수학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한국이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자, 유학 수학에 한계를 절감하였다. 이때부터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을 구독하면서 한말 이래 자강론자들의 주장에 빠져들었다. 마침 아버지도 신학문을 배울 것을 적극 권유해 1906년 4월, 담양군 창평면에 고정주(高鼎柱)가 세운 영학숙(英學塾)에 들어갔으나,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07년 후기의병(일명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김성수에게 “적을 치자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면서 일본 유학을 함께 갈 것을 설득하여 부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08년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학 생활 끝에 1910년 4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8월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1911년 봄 재차 도일하였고 근대 국가의 법체계를 배우기 위해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로 옮기게 된다. 대학 시절 강의보다는 일본 정치계의 동향과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11년부터 1915년까지 각종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혁적 신문과 잡지를 애독하였다. 또한 다화회(茶話會) 회장, 재일동경조선유학생연합친목회 총무로서 활동하면서 재일 유학생들을 앞장섰고, 재일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을 맡기도 하였다. 1915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김성수가 인수한 중앙학교(中央學校)의 학감으로 취임하면서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17년 일반 사회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단군과 세종대왕, 이순신의 3성을 받드는 삼성사건립기성회(三聖祠建立期成會)을 조직하고 경향 각지에서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1919년 만세운동 준비과정에서 재일 유학생과의 연락 및 기독교와 천도교의 연결, 민족 대표 선발과 학생조직을 동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교장이었던 중앙학교는 이를 모의하고 추진하는 본부 역할을 담당했다. 이 때문에 3월 중순경에 붙잡혀 1년 7개월 간 옥고를 겪고, 1920년 11월 1일 풀려났다. 1921년 1월 하순에 『동아일보』 사장으로 합류하게 되는데, 이후 『동아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사장·주필·취제역·고문 등으로 『동아일보』 운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 1922년 2월부터 지면을 통해 민립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오던 중, 같은 해 11월 발족한 민립대학기성준비회에 참여하였다. 1924년 결성된 ‘각파유지연맹’ 등 친일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에도 앞장섰다. 이 때문에 친일세력은 ‘ 육혈포 협박 사건’을 일으켜 폭행하고 위협을 가하였다. 이 사건은 폭행에 대한 민중대회 요구로 발전하였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금지당해 개최되지 못하였다. 1925년 7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제1회 태평양회의에 참석하였다가 귀국한 후, 조선사정조사연구회(朝鮮事情調査硏究會)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6년 3월 3일 사회주의 계열의 국제농민본부가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전보 메시지를 『동아일보』에 게재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8년 1월 9일 신간회 경성지회에 입회하였다. 민족운동이 제대로 된 정치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중의 세력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대중, 그중에서도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농민대중의 단체행동의 경험과 민중사상의 통일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대중의 문맹퇴치가 가장 시급하다고 보았다. 1931년 7월부터 1934년까지 『동아일보』를 통해 매년 한 차례씩 4년간에 걸쳐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이후 우리의 독자적인 사상적 문화적 전통과 역사를 확립하는 것이 민족운동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며, 이를 통해 민족주의세력 주도의 자립적 근대국가건설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사상혁신’, ‘문화혁신’ 주장으로 나타나게 되고, 충무공을 비롯한 민족 위인들의 유적지 보전 운동과 한글에 대한 선양 사업 추진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10개월간의 무기 정간에 처해지자, 총독부는 정간 해제의 조건으로 주요 편집진, 관련 기자 총 13명의 인책 해직, 주요 간부 선임 사전 승인, 신문의 거의 모든 기사 내용과 편집방향을 규제하는 언론보도지침인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의 준수 등을 내세웠다. 이에 저항하여 싸웠지만, 10개월의 무기정간과 폐간을 위협하는 총독부 방침에 굴복하여 『동아일보』에서 물러났다.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정간 해제되었지만, 같은 해 7월 발발한 중일전쟁을 계기로 급격히 친일 논조로 전환하였다. 정간 해제 후 『동아일보』의 고문으로 위촉되었지만 예전과 달리 신문 경영이나 내용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병을 핑계로 집에서 소일하였다.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된 후 청산대표 취체역으로 청산 업무를 처리하고, 청산 업무가 마무리된 후에는 사옥을 관리하는 동본사(東本社) 사장 역할을 일시 담당하였다. 그렇지만 그 이외의 모든 정치 사회활동과 담을 쌓은 채 친일과 관련한 오점을 남기지 않았다.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에는 수석 총무로, 국민대회준비회의 결성에는 위원장으로 이들 조직을 주도하였다. 임시정부가 당면의 과도정부 역할을 수행하면서, 정식 정부는 국내외의 반민족 분자를 제외하고 민주주의적인 각 정파의 제휴와 연결 속에 국민대회준비회가 주도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결성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계개편 구상은 국민대회준비회의 1946년 1월 10일 ‘국민대회’ 개최 주장과 이를 위한 활동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른 ‘신탁통치’ 국면이 도래하고, 그 와중에 한현우(韓賢宇)에 의해 암살되면서 정개 개편 운동은 무산되었다. 별도의 저술은 없고,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논설과 주장을 모은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가 간행한 『거인의 숨결-고하 송진우 관계 자료문집』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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