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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성

方致成

1874. 10. 2 ~ 1919.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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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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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天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천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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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천안군 갈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74년 10월 2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성남면(城南面) 봉양리(鳳陽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방치석(方致錫)·방성규(方聖圭)를 사용하였다. 1919년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병천리(竝川里)의 아우내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현장에서 희생되었다. 1919년 4월 전개된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은 평화롭게 진행되었음에도 일제 헌병의 발포로 19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만세시위 중 하나인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는 천안의 병천(竝川) 지역과 수신(修身)·성남(城南) 지역에서 준비되던 두 갈래의 만세운동이 하나로 합쳐져 전개되었다. 병천 지역의 만세운동 준비는 유관순(柳寬順)·유예도(柳禮道) 등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이 귀향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13일 귀향한 유관순은 16일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이백하(李伯夏) 등 지역의 유력 인사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와 함께 유관순은 병천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하여 이들로부터 적극적인 동의를 받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 모임에서 거사일은 아우내장터 장날인 4월 1일로 결정되었다. 수신면과 성남면 지역에서는 병천보다 늦은 3월 29일부터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고종의 장례에 참례했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이순구(李旬求)·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 등을 시작으로 한동규(韓東圭)·박영학(朴榮學)·이백하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도 장날인 4월 1일을 만세운동 거사일로 결정하고 시위 준비에 착수하였다. 아우내장터가 멀리는 충북의 청주(淸州)와 진천(鎭川), 가까이는 천안군(天安郡) 내 각 면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큰 장이었기 때문에 만세운동의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병천과 수신·성남 양쪽의 만세운동 계획에 모두 참여하고 있었던 이백하는 비밀을 유지하였고, 지역간 연락을 맡고 있던 김상훈(金相勳)을 통해 두 지역의 만세운동 계획이 하나로 결합되도록 하였다. 두 지역의 만세운동 주도자들은 3월 31일 밤 매봉산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 수신면 산마루, 충북 진천(鎭川)의 고갯마루에서 봉화를 올렸다. 이것은 예정대로 다음 날인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이라는 사전 연락이었다. 4월 1일 아침 만세운동에 참여할 결의를 다지고 집을 나섰다. 장터로 향하는 길목에서 사람들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호소하며 태극기를 배포하고 있던 조병호(趙炳鎬)·조만형(趙萬衡)·박봉래(朴鳳來) 등으로부터 태극기를 받아 옷 속에 숨기고 장터로 들어가 기다렸다. 오후 1시경 장터 한가운데에 대형 태극기가 세워지고, 병천 지역에서 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했던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곧이어 유중권·유중무·조병호 등이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따라 불렀다. 이것을 신호 삼아 일제히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품속에 감추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만세시위가 발생했음을 인지한 병천헌병주재소에서 헌병대가 출동하였다. 일제 헌병은 3,000여 명의 시위대에게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만세시위에 참여한 주민들과 함께 대열을 형성하여 더욱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외치면서 장터의 곳곳을 활보하며 평화롭게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만세시위대를 향한 헌병대의 총격이 시작되었고, 김상헌(金相)憲이 사망하면서 만세시위 양상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분노한 다른 주민들과 함께 일제 헌병들을 쫓아가 주재소 습격에 참여하였다.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일제 헌병의 발포에 격렬하게 책임 추궁을 하였다. 이렇게 만세시위 양상이 격화되자, 조인원이 다시 나서서 평화시위의 의미를 강조하며 분노한 시위대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일제 헌병의 폭력적 탄압이 다시 시작되어 유중권 등이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조인원과 유관순도 부상당하였다. 이러한 일제 헌병의 강압적인 진압으로 시위대가 흩어졌지만, 잠시 후 한동규·이백하·이순구·김상철金(相喆) 등의 지휘에 따라 100여 명의 주민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주재소를 공격해 기물을 파손하고 유치장 벽 등을 파괴하였고, 구금자를 석방하였다. 다른 주민들과 함께 주재소를 습격하는 동안 병천헌병대의 지원 요청을 받고 천안에서 급파된 철도엄호대 6명이 오후 4시경 아우내장터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총을 쏘며 병천헌병대와 합류하였다. 이때 일제 헌병과 철도엄호대에 맞서 시위대의 선두에서 저항하였으나, 시위대를 향해 집중 사격하는 일제 헌병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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