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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창희

方昌熙

1884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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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방창희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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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성천(成川)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성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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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1)

관련 사건

  • · 성천군 성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1)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삼흥면(三興面) 일청리(一淸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36세로 1884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성천군 성천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성천군의 만세운동은 천도교(天道敎) 성천교구장(成川敎區長) 이돈하(李燉夏)가 평양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돈하는 성천군 내 천도교도를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일인 3월 4일 오전 10시 천도교도 수백 명이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는 한편,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이끌었다. 군중이 호응하면서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읍내의 성천헌병분대에 도달하였다. 시위대 중 일부가 헌병분대에 들어가서 현장에 있던 헌병분대장을 구타하는 한편 각종 집기와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실탄을 발포하여 30여 명이 죽고, 30여 명이 다쳤으며, 400여 명이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세 군데 총상을 입고 일제 헌병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유죄를 받고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일본은 10년 동안 압박정치를 취하였고, 강화회의에 민족자결 문제가 제출되어 2천만 동포가 민족의 의무로 같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시위를 할 때 비무장 시위대에 병기를 사용하였고, 본인도 3곳에 총상을 받은 것은 일제의 실책이다”라며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 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6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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