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95. 9. 16 ~ 1934. 8.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9)
관련 사건
- · 강화군 부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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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9) 1895년 9월 16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길직리(吉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면서,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 강화읍내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강화도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기획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유봉진(劉鳳鎭)은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溫水里) 주민이었는데,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자 기독교도였다. 그는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3월 초부터 강화시장 장날을 이용한 만세시위를 지역 기독교인들과 함께 준비하였다. 이들은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시위 계획을 강화군민에게 알리는 한편, 독립선언서를 포함한 여러 문서를 제작하였다. 제작된 독립선언서는 3월 15~16일부터 은밀하게 배포되었다. 1919년 3월 15일 같은 마을에 살던 차동식(車東植)의 아내 기제사(忌祭祀)에 방문하였다가 누군가 창밖에서 던져 넣은 「강화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습득하였다. 3월 18일 읍내시장에서 만세운동을 하라는 격문 내용을 기제사 참석자들 앞에서 낭독하며 만세시위 참여 여론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거사일인 3월 18일 읍내시장으로 갔다. 오후 2시 장터에는 이미 수천 명의 시위 군중이 모였고, 이들과 함께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조선 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일제 식민 지배의 상징인 강화군청으로 가서 군수 이봉종(李鳳鍾)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여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만세시위가 본격화되자 참여 인원은 약 1만 명 가까이 늘어났으며, 시위대 해산을 위해 나온 일제 경찰들을 구타하는 등 열기가 고조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유희철(劉熙哲)과 조기신(趙基信) 등 몇몇 인물들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오후 5시 연행된 사람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시위대의 선두에서 강화경찰서로 갔으며,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인천경찰서(仁川警察署)에서 약 10명의 순사가 추가로 파견되었지만 시위 군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일제 경찰은 구금자를 석방시켰다. 이에 시위군중과 함께 이튿날도 만세시위를 이어갈 것을 결의하고 밤 11시 자진 해산하였다. 3월 19일 오전 8시, 용산(龍山)에서 일본군 장교 이하 군인 40명이 파견되어 전날 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다. 이때 붙잡혀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5월과 벌금 20원(미결구류일수 150일 본형 산입, 벌금 불납시 20일간 노역장)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5년 여름 네 차례의 홍수로 전국적인 피해가 발생하자 길상면에서 수해구제금을 걷어 10월 18일 동아일보사 인천지국에 기탁하였는데, 이때 동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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