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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병

朴宗秉

1889. 7. 13 ~ 1971.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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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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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회덕(懷德)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회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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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대전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9년 7월 13일 충청남도 회덕군(懷德郡) 산내면(山內面) 침산리(砧山里, 현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조선 전기의 무관이었던 박제함(朴悌諴)의 18대 종손이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향리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대전 인동(仁洞)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인동장터는 3월 3일 나무꾼들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주도하는 시위가 계속된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괴리(三槐里)에 사는 김직원(金直源)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엿보았다. 3월 27일 인동시장 상인들이 주도하여 벌어진 시위에 김직원의 친인척들이 다수 참가하여 일제 경찰에 붙잡히자, 김직원과 함께 인동장터 장날인 4월 1일에 거사하기로 계획하였다. 이에 3월 31일 김직원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사람들이 운집한 장터에서 김직원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고 행인들에게 참여를 권유하였다. 시장에 있던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시위 군중이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일제 경찰들이 출동하여 해산을 요구하며 무력을 사용하자, 성난 시위 군중이 돌을 던져 순사 2명과 순사보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에 대전소학교 근교에 배치된 일본군 80연대 제3대대 소속 1개 소대가 시장으로 출동하여 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그 결과 정대귀(鄭大貴)·방춘실(方春實) 등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만세시위가 끝난 후 김직원과 함께 대전경찰서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8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만세운동은 “조선 민족의 정당한 의사 표현이므로 범죄가 아니다” 라는 취지로 항소를 제기하였다. 같은 해 5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 취지는 무시되었으나, 제1심 판결의 근거가 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이 제정되기 전의 사건이었음이 인정되어 징역 10월로 감형되었다. 다시 불복하고 상고하였지만, 그 해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10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0년 4월 석방된 후 192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1926년 귀국할 때까지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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