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규
朴宗奎1885. 2. 14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이천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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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1885년 2월 14일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이천면(伊川面) 남좌리(南佐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송규(朴宋奎)를 사용하였다. 천도교인(天道敎人)이다. 1919년 4월 이천군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천군에서 처음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영양면(榮壤面, 현재 낙양면(樂壤面))으로, 1919년 4월 4일과 4월 5일 이틀 동안 펼쳐졌다. 천도교인 김병하(金炳河)·김응제(金應濟)·김이순(金利淳) 등이 중심이 되어 영양면 지석리(支石里)와 내락리(內洛里)·지하리(支下里)의 천도교인과 주민들을 규합하여 헌병주재소(憲兵駐在所)에서 투석전을 전개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6일과 7일에도 읍내면(邑內面) 탑리(塔里) 장터에서 남좌리와 용포면(龍浦面)의 천도교인들이 주도가 되어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적극적으로 주도한 이천군 읍내 만세시위도 그 연속선상에 있었다. 이천군에서 연이어 만세시위가 전개되는 상황에 동참하기 위해서, 4월 7일 밤 마을 천도교구실로 쓰고 있던 박필주(朴弼周)의 집에서 박응규(朴應奎)·이형모(李亨模)와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박응규와 함께 마을을 돌면서 주민들에게 다음날 만세운동 계획을 알렸다. ‘독립운동을 할 동지는 모이라’고 하며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4월 8일 거사 당일 아침 박응규와 함께 이형모의 집에 가서 시위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형모는 이웃 마을 주민들을 모으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박응규와 함께 마을 주민들과 약속한 곳으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마을 주민 100여 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여 있었다.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선 박응규의 뒤를 따랐다. 시위대와 함께 만세를 부르며 마을을 행진하였다. 추목리(楸木里) 인근에서 이형모가 이끄는 300여 명의 주민들과 합류하였다. 박응규 ·이형모와 함께 400여 명의 대규모 시위대를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이천군 읍내로 행진하였다. 저녁 무렵 읍내에 도착한 시위대는 읍내를 돌며 시위를 펼친 후 이천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와 경찰서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만세운동에 일본은 헌병과 경찰을 시위 현장에 급파하여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박응규·이형모와 함께 현장에서 붙잡혔고 태극기도 빼앗겼다. 일제 경찰에 붙잡힌 후 1919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그해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를 기각하였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도 상고를 기각하면서 징역 1년 6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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