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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홍

朴台弘

1892. 2. 28 ~ 1944.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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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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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晋州)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진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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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진주청년회
  • · 진주노동공제회
  • · 진주청년연맹
  • · 진주노농연맹
  • · 동인회
  • · 조선공산당
  • · 신간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관련 사건

  • ·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5) 1892년 2월 28일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 진주면(晋州面) 평안동(平安洞, 현 진주시 평안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박태홍(朴台洪·朴泰洪)을 사용하였다. 유년기에 10여 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사회주의자 강달영(姜達永)과는 동향 출신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교류하였다. 청년기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우암(愚菴)이라는 도호(道號)를 받았다. 1919년에 천도교 청년운동단체로서 발족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天道敎靑年敎理講硏部) 소속으로 경남 일대와 서울에서 강연하였다. 1920년 천도교교리강연부가 천도교청년회로 발전하자 진주지역의 간부로서 교세 확장과 문화계몽 활동에 노력하였다. 1922년 천도교 진주종리원 종리사(宗理師), 1923년 진주 천도교소년회 담론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2년 동아일보 진주지국의 총무·회계를 담당하였고, 이후 조선일보 진주지국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강달영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1921년 진주청년회(晋州靑年會)가 조직을 확대·재편할 때 강달영·박진환(朴進煥) 등 진주지역 청년들과 함께 임원으로 선출되어 덕육부(德育部)·사교부(社交部)·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 진주지역 청년회관과 유치원·학교 건립 운동, 문화·체육행사 개최 등을 주도하였다. 1922년부터는 강달영과 조우제(趙佑濟)가 설립한 진주노동공제회(晋州勞動共濟會)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진주지역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노동쟁의를 중재하였으며, 강연·토론회를 개최해 사회 현안을 논의하였다.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운동을 일본어 신문 『조선민보』가 왜곡 보도하자 이에 항의하는 활동을 펼쳤다. 1924년에는 일본인 사업가 시미즈 사타로(淸水佐太郞)가 사기 행각을 벌이자 이를 규탄하는 활동에 앞장섰다. 또한 경남도청 이전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3년 9월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경찰은 진주의 한국인들이 일본 국내의 혼란을 계기로 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관공서를 폭탄으로 파괴하고자 하였다는 이유를 내세워, 청년·노동단체 회원들을 검속·체포하였다. 이때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혔다가 곧 풀려났다. 1924년 9월 7일 박진환·정준교(鄭準敎) 등 진주노동공제회 인사들과 함께 ‘국제 무산청년의 날’을 기념하면서 “정의·인도에 기반 하지 않고 재산이 있고 없음에 따라 계급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금의 사회 현실이 무산청년운동을 일으키고 있다”라는 취지의 감상담(感想談)을 통해 식민 통치와 자본주의 제도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여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25년 8월 강달영의 권유를 받고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6년 3월 26일 조선공산당 경남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은 순종의 장례식에 맞추어 6월 10일에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경찰에 발각되었고 이후 조선공산당 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1926년 7월 26일 진주군 평안동 자택에서 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일제 당국은 전국에서 체포한 사람들을 조선공산당 조직원으로 간주하여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1927년 10월 27일 예심에서 조선총독부 판사 야모토 쇼헤이(矢本正平)를 상대로 공산주의와의 연관성을 부정하면서, 사회운동에 참가한 것은 한국의 독립을 목표로 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식민통치의 전복을 목표로 했다는 이유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1926년 7월 26일 붙잡힌 이후 투옥된 채로 재판을 받았고, 재판 중 미결 구금기간 150일이 형기에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29년 1월 풀려날 때까지 약 2년 5개월 동안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민족유일당운동에 투신하여 1929년 11월에는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12월에는 진주지회의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30년 신간회 진주지회 대표를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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