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휘병
朴輝秉1905. 12. 3 ~ 1933. 3. 1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당우청년회
- · 당우농민동맹
- · 고려공산청년회 덕원야체이카
- · 신간회 덕원지회
- · 덕원적색노동조합
포상 정보
- · 애국장(2007)
관련 사건
- · 원산 격문 사건
- · 함남공청 사건
- · 함남공산당 사건
- · 덕원농민조합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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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7) 1905년 12월 3일 함경남도 덕원군(德源郡) 적전면(赤田面) 당하리(堂下里)에서 부친 박승진(朴承進)과 모친 홍보인(洪保仁) 사이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의 주소지는 덕원군 북성면(北城面) 용평리(龍坪里)였다. 이명으로 박휴병(朴休秉)·박덕삼(朴德三)·박성춘(朴成春) 등을 사용하였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인 박무병(朴武秉)의 형이다.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를 졸업하였고, 이후 고향인 당하리의 광성학교(光成學校) 교사와 『동아일보』 원산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덕원(德原)과 원산(原山) 등지에서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무렵부터 함남 덕원군의 당우청년회(堂隅靑年會)와 당우농민동맹(堂隅農民同盟)의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농한기를 이용해 농민야학을 개설하고 강사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농민의 권익 확보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10월 16일 덕원청년연맹(德原靑年聯盟)이 해체되고 덕원청년동맹(德源靑年同盟)이 결성될 때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1월 10일 당우청년회를 해체하여 덕원청년동맹 당우지부를 창립하고 지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1월 1일에는 박문병(朴文秉)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였다. 이어서 곧바로 박문병과 동생인 박원병(朴元秉)과 함께 덕원야체이카를 조직하고 책임비서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박문병과 박원병이 일제 경찰에 쫓겨 도피하여 활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29년 5월 중국 지린(吉林)에서 송병천(宋秉天)이 국내로 들어온 것을 계기로 덕원야체이카를 재건하였다. 이어서 고려공청 함남도간부기관 결성을 주도하고 책임비서로 활동하면서, 기관지 『공산주의』 등을 발간하였다. 1928년 2월에는 신간회(新幹會) 덕원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8월 3일 일명 ‘원산 격문 사건’으로 원산경찰서에 붙잡혔다. 같은 달 30일경 문천(文川)·안변(安邊) 등 각지에서 붙잡힌 40여 명의 청년과 함께 함흥(咸興)으로 이송되었다가, 같은 달 31일 그를 포함하여 5명만 기소되어 함흥지방법원의 예심(豫審)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함흥·원산·북청(北靑) 등지에서 백수십 명이 검거된 이른바 ‘함남공청(咸南共靑) 사건’, ‘함남공산당 사건’으로 확대되어 결국 수십 명이 기소되었다. 일제 당국이 같은 해 6월 원산에서 개최하기로 했던 전선대회(全鮮大會), ML당의 격문 사건, 과거 이원(利原)·철산(鐵山)의 다이너마이트 도난 사건 등을 모두 연결시켜 사건을 확대한 것이었다. 1931년 5월 13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고, 같은 달 20일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 1932년 2월경부터 비밀결사 덕원적색노동조합(德源赤色勞動組合)을 조직하고 동지들과 함께 각 면의 10여 개소에 농민야학을 개설하였다. 또한 같은 해 5월경부터 각지에서 청년 수백 명을 대상으로 강좌를 실시하여, 이들 가운데 다시 진화소녀회(進化少女會)라는 결사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하는 등 농민의 권익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33년 3월 12일 마르크스 50주기 기념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이른바 ‘덕원농민조합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붙잡히게 되었다. 원산경찰서 고등계에서 모진 고문과 조사를 받던 중, 다음 날인 1933년 3월 13일 갑자기 사망하였다. 붙잡히기 하루 전날인 3월 11일에 축구대회에 선수로 참가했을 정도로 평소 건강 체질로 알려져 있던 터라, 갑작스러운 의문사에 대해서는 원산지방법원 검사국에서도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달 14일 부검을 실시하고 15일에는 담당 고등계 형사 다카노 히데오(高野秀雄)·이와모토 고로(岩本五郞)·김창조(金昌朝) 등을 조사한 결과, 결국 상해치사로 판명되었다. 이에 3명의 경찰이 검거되는 사건으로까지 확대됨으로써 세간의 이목을 끌었고, 결국 1933년 6월 1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다카노는 징역 2년, 나머지는 징역 1년과 집행유예 3년, 그리고 ‘은급(恩給) 취소’를 받게 되었다. 이 판결에 대해 같은 해 9월 22일 부모와 부인 김병한(金炳漢) 등 3인은 직무수행 중 일어난 불법 사건인 만큼 그 사용인인 국가, 즉 그 대표자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을 상대로 5,000원의 위자료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또 한번 주목을 받았다. 장례는 1933년 3월 17일 원산부(元山府)와 고향인 당하리에서 가족 친지와 동지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단체장으로 치러졌다. 원래 하루 전인 16일에 장례가 치러질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강기덕(康基德)·송병식(宋秉植) 등 장례위원들이 검속당하는 바람에 연기된 것이다. 장례 당일에도 일제 경찰은 ‘박휘병 가(家) 부근 일시 통행금지’라는 문구를 내걸고 통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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