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복
成周復1894. 8. 29 ~ 1971. 4.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5)
관련 사건
- · 1919년 서울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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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5) 1894년 8월 29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의왕면(儀旺面, 현 의왕시) 청계리(淸溪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22세 때인 1915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의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청년학관에 입학하였다. 공부를 위해 경기도 부천군(富川郡) 주남면(柱南面) 개봉리(開峯里, 당시 경인선 오류역 부근, 현 서울 구로구 개봉동) 김재달(金在達)의 집으로 이사하여 기차로 통학하였다. 이 무렵 기독교에 입문하여 정동교회(貞洞敎會)에 다녔다. 1917년 청년학관이 폐교되자 이듬해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배재고보)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9년 3월 3일 배재고보 4학년생으로 동료들과 함께 고종 장례식에 참례하였다. 3월 5일에는 서울지역 학생 지도부가 계획한 남대문역(현 서울역)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오전 9시 남대문역 앞에는 수많은 시위군중이 모였다. ‘독립만세’ 등의 수많은 깃발을 앞세우고 이날 만세시위를 기획한 강기덕(康基德)과 김원벽(金元璧) 등이 선두에 서서 인력거를 타고 시위를 이끌었다. 남대문역에서 대한문을 지나 태평정(太平町, 현 서울 중구 태평로)을 거쳐 종로 보신각으로 진출하여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예심이 종결되었다. 예심 과정에서 일본인 판사의 독립운동에 대한 신문에 대해, “조선이 독립해 나갈 힘이 생겼고,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고 어떠한 약소국이라도 민족이 자결하면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하였다. 또 판사가 “장래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신문에 대해, “조선인이므로 또 독립운동이 있으면 참가하겠다”고 당당히 밝혔다.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미결구류일수 중 9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고, 1920년 2월 10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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