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병
朴亨秉1886. 7. 14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17)
관련 사건
- · 105인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7) 1886년 7월 14일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세동(細洞) 소서산(小瑞山)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 주소지도 동일한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계속 성장하였으며, 직업은 주상(酒商)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명근 등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0년 12월 19일 안명근(安明根) 등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참여하였다. 안중근(安重根)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은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직후부터 남만주(南滿洲)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기 위해,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전개하였다. 안경근은 한때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가 풀려난 뒤에도 황해도 일대에서 계속 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한순직(韓淳稷)·원행섭(元行燮)·양성진(楊星鎭)·고봉수(高奉守)·한정교(韓禎敎) 등과 함께 안명근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자산가(資産家)가 많은 황해도 안악읍(安岳邑)을 중심으로 자금을 모집하기로 하고, 안악읍에 있는 원행섭의 집에 모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거사 당일인 1910년 12월 19일 밤 이들은 읍내 자산가의 성명, 자산의 다과(多寡),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의 위치,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 등을 일일이 조사하여 기록해두었고, 다음날인 12월 20일 밤 11시경 교외의 남산(南山) 습락현(習樂峴)에서 집합하기로 하였다. 습락현 집합에 앞서 원행섭·한순직과 함께 헌병분견소와 그 부근 일대의 일본인 가옥 상황을 정찰해두었다. 그리고 권총을 휴대하고 안명근 등과 함께 습락현으로 가서 김구(金龜) 등의 집단과 합세하여 읍내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거사 당일에 모일 인원이 예상보다 적었다. 게다가 안악읍 내의 자산가는 (음)12월 이전에는 거액의 현금을 소지하고 있지 않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에 이들은 당일의 거사를 연기하고, (음)12월 15일 밤에 다시 모이기로 하였다. 하지만 실행하기 전인 1911년 1월 10일경 안명근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를 포함한 동지들 다수가 붙잡히게 됨으로써 모든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런데 강제병합 직후 한인의 항일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주시하고 있던 일제 당국은 안명근 등의 이러한 활동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총독 암살을 위한 모금 활동”으로 날조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민회(新民會) 회원을 비롯한 전국의 항일운동가들을 탄압하였다. ‘안명근 등의 사건’으로 모두 600여 명을 붙잡아, 온갖 고문을 가한 끝에 결국 105명에게 실형을 선고한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확대한 것이었다. 이 일로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강도미수(强盜未遂)로 징역 7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즉시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4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12년 9월 13일 이른바 ‘은사(恩赦)에 관한 조서(詔書)에 따른 특전(特典)’으로 징역 5년으로 감형되었다. 1914년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10월 10일로 감형되었다. 1915년 3월 12일 서대문감옥에서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1931년 6월에는 대림농장(大林農場)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소작인 280여 명과 함께 안악군 대원면(大遠面) 엄곶리(嚴串里)의 안녕수리조합(安寧水利組合) 출장소(出張所)를 습격하고, 감리원(監理員) 이진학(李震學)·기수(技師) 김웅진(金雄鎭) 등의 부당함에 맞섰다. 이 일의 주도자로 몰려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조사받았는데, 쌍방의 타협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면서 풀려나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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