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충
徐世忠1888. 7. 5 ~ 1957. 11.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동청년단
- · 신흥무관학교
- · 임시정부
- · 주비단
- · 조선민흥회
- · 신간회
-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 민중동맹결성준비위원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8년 7월 5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 공덕리(孔德里, 현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호는 춘강(春江)이며, 서세두(徐世斗)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1907년 관립 한성고등학교(漢城高等學校, 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이어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일본어부 속성과에서 수학하면서 1909년 안희제(安熙濟)·남형우(南亨祐)를 비롯하여 신백우(申伯雨)·박중화(朴重華) 등 80여 명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국외 독립운동기지 개척과 독립운동 연락망을 구축하기 위해 1911년 친우 신백우(申伯雨)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안동(安東, 현 단동(丹東))으로 망명하였다. 초여름 경에 안동 흥륭가(興隆街)에 성신태(誠信泰)라는 상호의 상점을 열고 여관업을 함께 운영하며 서간도 독립운동계 연락을 담당하였다. 그 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형위원(銓衡委員)으로 선출되어 서울대표를 역임하였다. 1921년, 서울에서 조직된 주비단(籌備團)이 일제 경찰에 발각된 일명 주비단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주비단은 1919년 6월 서울에서 심영택(沈永澤)·이민식(李敏植)·안종운(安鍾雲) 등 80여 명이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군자금 모집과 연락을 목적으로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서울에서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 관계 문서와 「군사주비단단적부(軍事籌備團團籍簿)」가 발견되면서 주비단 관련자들이 붙잡히자 연통부(聯通府) 관계자와 교통사무국(交通事務局) 주요 인물과 함께 붙잡힌 것이다. 이후 1926년 7월 서울청년회와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가 중심이 되어 발기한 민족협동전선단체인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에 참여하여 11월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면서 1927년 2월 11일 조선민흥회의 회원 전원이 신간회 가입을 결정하자, 그 결정에 따라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8년 3월 21일 열린 신간회 경서지회(京西支會) 설립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신간회 활동 당시 익세보(益世報)라는 중국 베이징에 본사를 둔 조선지국장 일을 맡았으며 출판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36년 2월에는 절친한 관계였던 독립운동가 신채호(申采浩)가 랴오닝성 뤼순(旅順) 감옥에서 뇌일혈로 쓰러지자, 신채호의 부인 박자혜(朴慈惠)와 동행하여 신채호를 면회했으나 혼수상태에 빠진 채로 2월 21일 감옥병동에서 사망하였다. 단재의 유해를 국내로 옮겨와서 청주 향리에 안장하였다. 광복 후,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발족할 때, 신백우·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고문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한중문화의 교류로서 양민족의 친선을 도모하고자 결성된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에서 정인보(鄭寅普)와 함께 부이사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48년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태평양 각 지구에서 징병·징용 등으로 끌려갔던 동포 청장년으로 조직된 태평양동지회(太平洋同志會)의 조직을 강화해 대일배상청구의 재료를 수집하는데 노력하였고 위 단체의 이사(理事)로 활동하였다. 1957년 11월 2일 숙환으로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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