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천택
裵天澤1892. 9. 27 ~ 1942. 10.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동청년당
- · 서로군정서
- · 군사통일촉성회
- · 국민당
- · 다물단
- · 북경한교동지회
- · 대독립당 조직 북경촉성회
- · 중국사정연구회
- ·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
- · 한족동맹회
- · 한국혁명당
- · 신한독립당
- · 민족혁명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다물단(서동일)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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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92년 9월 27일 경상도 대구부(大邱府) 수동(竪洞, 현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성산(星山)으로 추정된다. 본명은 배병현(裵炳鉉)이고, 이명은 배달무(裵達武)이다.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활동할 때 석정(石亭)이라는 별호도 썼던 것 같다. 소년기에 사립 수창학교(需昌學校)를 다녔고, 1907년 5월 경북 성주(星州)의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여 1냥(兩)을 의연금으로 냈다. 1907년 4월 관립학교로 개교하였다가 망국 후 조선총독부에서 인수 운영한 2년 과정의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傳習所, 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응용화학과에 1911년 제5회로 입학하여 1912년 12월에 졸업하였다. 명부에는 배병현(裵炳玹)으로 나온다. 1916년 중국의 베이징공업대학(北京工業大學)에 입학하여 다니다 곧 중퇴하였다. 1919년경 중국의 윈난강무당(雲南講武堂)을 졸업했다고도 한다. 남형우(南亨祐)·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1909년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1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사진업에 종사하고 있던 중, 미국에 있는 박용만(朴容萬)과 노백린(盧伯麟)의 의뢰를 받고 1917년 6월 경 상하이(上海)로 밀행하여 한인 상태를 조사하였다. 1919년 이상룡(李相龍)·김동삼 등이 서간도(西間島) 지역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설치했던 군정부(軍政府)를 얼마 후 임시정부 산하기관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할 때 동참하였다. 1920년 9월 베이징에서 박용만의 주도로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가 결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남만주로 파견되어 독립군 대표들의 참여를 독려하며 통일회의 개최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1921년 5월 베이징에서 열린 군사통일회의에는 불참하였다. 1921년 4월에는 미국이 한국을 위임통치토록 윌슨대통령에게 청원했던 이승만(李承晩)·정한경(鄭翰景) 성토문에 연서(連署)하였다. 동년 11월 베이징에서 박용만의 주도로 설립된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선임되었는데, 그 조직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곧 좌초되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김동삼·이진산(李震山)과 함께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하여 비서장(秘書長)으로 선출되었고, 군사분과 위원도 겸하면서 개조파(改造派) 간부로 활동하였다. 3월 1일 국민대표회의 참석자 합동의 독립선언 기념식에서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같은 해 3월 하순에 남형우·김동삼·한진산(韓震山)·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국민당(國民黨)을 새로 조직하고, 선전부장이 되었다. 경북 출신의 개조파 인사들을 주축으로 독립전쟁 준비를 표방하여 설립된 이 당은 남만주의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와의 유대 아래 토지개척 사업으로 군자금 획득, 군대확충과 군사간부 양성, 모험단을 조직하여 직접행동 감행 등을 활동방침으로 내걸었다. 같은 해 5월 15일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으로 회의가 당초 목적인 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이유로 서로군정서에서 보낸 소환통고서에 의해 대표자격이 정지되고, 비서장 직도 자동 면직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성과 없이 완전 결렬되어버린 후 베이징으로 가서 북성(北城) 피구호동(皮口胡同) 18호에 거처를 정하고, 대구 출신인 서동일(徐東一)과 이상도(李相道)를 만나 국민당에 가입시켰다. 1924년 1월경 국민당 서무부장 겸 외교부장으로서 이사장 남형우와 함께 재무부장 서동일에게 군자금 모집 임무를 주고 국내로 밀파하였다. 그리하여 서동일이 서울과 경북 경산(慶山)·청도군(淸道郡) 일원에서 부호들을 상대로 모금해 온 1,100원을 2월에 전달받았다. 그 돈은 당원들의 생활비로 충당되었다. 1924년 4월 베이징 한인사회 내의 독립운동 방해 요소인 부정행위, 친일자, 밀정을 파악해내기 위해 한교구락부(韓僑俱樂部)에서 선출한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5월에는 동 구락부의 선전위원이 되어서, 1923년 9월의 간토대지진(關東大地震) 때 일본인이 저지른 한인 학살 실상을 폭로하고 격렬히 비판하는 내용의 문서를 「학살」이란 제목으로 작성하고 인쇄하여, 베이징 주재 각국 공사관과 각지 영사관으로 보내어 배포하였다. 같은 해 7월 원세훈(元世勳)·신숙(申肅) 등 창조파 인사들과 함께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를 조직하여 실행위원이 되었다. 동지들과 함께 8월 29일 국치일에 항일의식을 담은 「시일야대외선언(是日也對外宣言)」이라는 제목의 문서 1,000매를 제작하여 베이징의 각국 공사관과 중국 관공서, 신문사, 각종 단체 등에 배포하였다. 1925년 3월 1일부터 1926년 중반까지 베이징에서 발간된 10인 동인지(同人誌) 『앞잡이[導報, The Lead of Korea]』의 간행을 한진산(韓震山)과 함께 주도하면서 그 지면을 통해 절대독립, 전투적 독립운동, 일대(一大) 독립당 건설을 주장하였다. 1925년 (음)1월 대구로부터 온 이정기(李定基)를 남형우·김창숙(金昌淑)과 함께 베이징에서 접견하고 국내에서 폭탄거사를 통해 운동자금을 거두기로 하여 폭탄제조법을 가르쳐주었다. 귀국한 이정기의 주도로 암살단(暗殺團)이 조직된 사실과 국내정세를 1926년 7월 베이징에 온 이원록(李源祿, 이육사(李陸史))으로부터 보고받았다. 1925년 3월 7일 김세준(金世晙)·서왈보(徐曰甫) 등과 북경재류한인유지자대회(北京在留韓人有志者大會)를 개최하여, 1월의 일소협약(日蘇協約) 체결에 대해 소련정부와 코민테른에 항의하는 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4월 4일 한진산·유우국(柳佑國)·서왈보·김세준과 함께 베이징 북성 마사묘(麻四廟)의 앞잡이사(社) 사무실에서 밀정·반적(叛賊)·광견배(狂犬輩) 처단 등의 직접행동을 수행해 갈 비밀결사로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였다. 이어서 5월에는 다물단 명의의 「악분자 소탕선언(惡分子掃蕩宣言)」을 작성, 배포함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직후 서동일에게 재차 군자금 모집 임무를 주어 경북 경산·청도군으로 특파하였다. 6월 11일에는 조남승(趙南升)·한진산·원세훈 등과 함께 상하이 5·30사건을 계기로 불붙은 중국 국민의 배일운동을 응원하는 내용의 「중국 국민의 구국구족운동(救國救族運動)에 당하여 아(我) 2천만 형제자매에게 고함」이란 격문을 써서 수천 부 인쇄하고 배포하였다. 1926년 8월 베이징에서 있었던 안창호(安昌浩)와 원세훈의 협의 결과로 같은 해 10월 10일 조양문(朝陽門) 대가(大街)의 한인교회에서 대독립당 조직 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 결성이 발기될 때 참여하여 집행위원이 되었고, 창립선언서와 간장(簡章)을 기초하였다. 같은 달 중국으로 귀화한 한인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목적의 조직을 설립코자 베이징에서 조직된 (중국)입적간민회(入籍墾民會) 발기주비회의 집행위원이 되어서 활동하고, 1년 후 1927년 10월에 입적간민회 창립대회를 가졌다. 또한 1926년 10월, 상하이에서 현정건(玄鼎健)·김상덕(金尙德) 등이 조직한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의 집행위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관내촉성회연합회(關內促成會聯合會)가 결성될 때 북경촉성회 대표로 파견되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동시에 5인 상무위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30년 2월 조성환(曺成煥)·손일민(孫逸民) 등에 의해 베이징에서 조직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에 참여하였고, 동년 7월 톈진(天津)에서 송호(宋虎)·박관해(朴觀海)와 함께 안창호를 만나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 촉진 문제에 관해 협의하였다. 그 후 1932년 상하이에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창립에 참여하였고, 그 당이 1934년 난징(南京)에서 만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으로 재편될 때 역시 참여하여 중견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경 난징에서 중국정부의 공안국(公安局)에 근무하면서, 김구(金九)와 안공근(安恭根)의 활동에 편의를 제공했다고도 한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상하이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의열단(義烈團), 미주(美洲)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등 9개 정당·단체의 해소 통합으로 단일 대당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성립할 때 동참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7년 9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상하이방송국에서 매일 저녁 30분간 ‘일본민족에게 고함’과 ‘조선민중에게 고함’이라는 연제의 선무방송 연설을 윤세주(尹世胄)와 함께 맡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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