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국
裵鍾國1924. 1. 29 ~ 2017. 3. 1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무등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무등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24년 1월 29일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봉황면(鳳凰面) 용곡리(龍谷里)에서 태어났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식 성명 강요로 개명된 무곡무남(武谷茂男)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1939년 3월 나주 봉황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4월 일본 히로시마현(廣島縣) 구레시(吳市)에 있는 흥문중학교(興文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940년 3월 1학년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1940년 4월 광주서중학교(光州西中學校)로 전학하였다. 1941년 3월 상순경 서중학교의 항일학생결사 ‘무등회’(無等會)에 가입하였다. 무등회는 1938년 강한수(姜漢秀)·기환도(奇桓度)·나금주(羅金柱)가 조직한 서중독서회가 보다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모색한다는 차원에서 1940년 4월경 명칭을 개칭한 것이었다. 고길현(高吉鉉)·기영도(奇英度)·기원흥(奇源興) 등과 함께 무등회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1942년 8월 상순경 광주 서석정(瑞石町)에 위치한 자택에서 이민수(李敏洙)로부터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일제의 태도는 불공평한데 그것은 한국이 독립국이 아니기 때문이며 한국인이 독립운동에 무관심한 것은 교육이 보급되지 않고 일치단결 정신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 보급과 민족의식 앙양에 힘쓰고 학생과 민중의 일치단결을 도모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찬동하였다. 그리고 “징병제가 곧 시행된다는데 한국은 독립국이 아니므로 징병군인으로 전쟁터에 갈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나누었다. 1943년 1월 하순경 집에서 신균우(申均雨)와 만나 찹쌀 배급의 불합리, 헤이그특사 사건, 한국 독립 등을 말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선배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서로 맹약하였다. 3월 23일경 집에서 박화진(朴和珍)·신균우 외 1명과 모여 상급학교 입학에서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별, 서중학교 선배 손의석(孫宜錫)의 독립운동 상황 등을 의논한 후, 서중학교 학생은 선배들의 뜻을 이어 한국 독립을 위해 일어나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3월 하순경 광주부 금정(錦町) 이민수 집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 교육 보급, 민중의 민족의식 앙양, 미국과 영국의 원조를 이끌어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의견을 나누었다. 1943년 4월경부터는 일부 하급생들 사이에 친일적 분위기가 성행하여 무등회 회원들과 함께 본격적인 교풍쇄신운동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을 이용해 하급생들의 교실을 순회하면서 항일운동의 필요성과 한국어 사용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일부 4학년 후배들이 이러한 활동을 하는 선배들에게 항의하였고, 무등회 회원들은 5월 10일 이들 학생들을 모아 놓고 체벌을 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당국에 포착되어 수사가 시작되었다. 무등회 회원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자 광주서중 학생들은 5월 21일 ‘창씨개명반대, 일어상용반대, 내선일체 반대, 일본상품 불매’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동맹휴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사건(무등회 사건, 제2차 광주학생운동)으로 350여 명의 학생들이 붙잡히고 약 30명이 구속되었는데, 이때 9명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일로 1944년 9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윤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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