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성
朴晋成1878. 12. 12 ~ 1925. 10.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안동군 임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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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78년 12월 12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중평동(中坪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이명인 박진선(朴晉先)으로 더 많이 불리었다. 임동면 중평동 편항시장(鞭巷市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임동면의 만세운동을 함께 이끌었던 사람들은 유연성(柳淵成)·유동수(柳東洙)·유교희(柳敎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박재식(朴載植)이다. 이들 가운데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던 유연성으로부터 “지금 만세운동을 펼치고 관청을 파괴하여 우리의 힘을 보여준다면 반드시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참여하게 되었다. 만세운동 주도자들은 3월 15일 중평동 편항시장 동편에 있는 공동 타작장 인낙장(籾落場)에 모여 거사 장소와 날짜를 논의하였다. 3월 21일 편항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한 주도자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동참시키기 위하여 구역을 나누어 참여자를 모았다. 이때 유곡란(柳谷蘭)·박재식과 함께 편항시장 부근 지역을 맡아,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의 취지를 알리고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를 권유하였다. 3월 21일 거사 당일 아침 편항시장에 도착하여 주도자 및 마을사람들과 함께 때를 기다렸다. 오후 2시경 계획한 대로 유연성이 군중 앞에 서서 만세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유연성의 선창이 있자 주도자들과 참여자들도 일제히 나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자 장터에 있던 장꾼과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시위 열기가 높아졌다. 이때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일제 경찰이 장터로 급파되었고,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며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체포하려 하였다. 이를 보고 시위대와 함께 제지하며 맞서자, 일제 경찰은 그대로 편항경찰관주재소로 달아났다. 사기가 높아진 주도자들은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로 향하였다. 유연성·배태근·조학이(趙學伊)와 함께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하였고, 5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행진을 하였다. 하지만 주재소에 도착한 시위대에게 일제 경찰이 총을 발사하며 위협하였다. 이것이 오히려 시위대의 분노를 사면서 만세시위는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돌과 몽둥이로 주재소 출입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 들어와 주재소의 창문과 책상·의자 등을 완전히 파괴하고 서류도 파기하였다. 그리고 일제 경찰에게서 빼앗은 총검과 주재소에 있던 무기를 모두 모아 주재소 우물 안에 버렸다. 기세가 오른 시위대 1,500여 명과 함께 면사무소로 이동하였고, 면사무소에 도착한 이후 입구를 부수고 벽과 창문·비품 등을 모두 파괴한 후 문서도 파기해 버렸다. 시위대의 격렬한 항거에 주재소와 면사무소는 앙상하게 뼈만 남게 되었다. 시위는 자정을 넘어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이어진 후 모두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주도자 검거로 붙잡혔고,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같은 해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건조물 손괴죄, 가택침입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 후 다시 징역 6년을 받았다. 옥고를 겪고 풀려났지만, 고문과 수감 생활의 후유증으로 1925년 10월 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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