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근
朴命根1909. 3. 2 ~ 1987. 10. 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혁우동맹
- · 적우동맹
- · 일우당
- · 대구청년동맹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6)
관련 사건
- · 혁우동맹
- · 적우동맹
- · 일우당
- · 대구청년동맹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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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6) 1909년 3월 2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덕산정(德山町, 현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에서 태어났다. 비밀결사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27년 12월 17일 대구 시내에서 장종환(張鍾煥)의 권유로 혁우동맹(革友同盟)에 가담하였다. 혁우동맹은 12월 15일 윤장혁(尹章赫)·장종환 등이 주도하여 조직되었다.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윤장혁·상무상(尙戊祥)과 대구중학교의 조은석(趙銀石) 등은 일찍부터 사회과학 독서회에 관여한 인물들로 12월 10일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실천할 단체로 신우동맹(新友同盟)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조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비밀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12월 15일 결사의 명칭을 혁우동맹으로 변경하였다. 혁우동맹은 마르크스주의 혁명 전술 함양과 조선 민족 해방운동 전개를 강령으로 삼았고, 조선공산당의 조직 방법인 야체이카를 채택하였다. 결사의 책임자들은 각각 야체이카를 담당하였다. 가입을 권유했던 장종환은 정치부 위원이었다. 결사 가입 후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중에 장종환 등이 조직한 야체이카(ячейк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28년 2월 중순 결사원들이 모임을 갖고 더 큰 결사 조직을 위해 동맹의 해산을 결의하였다. 그 해 2월 26일 본부와 야체이카 회원을 합병하여 적우동맹(赤友同盟)으로 개편하였다. 야체이카 활동 및 개편 과정에 꾸준히 참여하였고, 적우동맹 개편 후에는 보통회원으로서 활동 기반을 넓혀갔다. 1928년 4월 신학기에 들어서며 대구고보생들의 퇴학 처분에 대한 대응책을 두고 동맹 안에서 분규가 일어났다. 강력한 투쟁을 주장한 맹원들은 동맹휴학 단행을 주장하였다. 신중론을 편 학생들은 그럴 경우 조직이 발각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강경론을 주장한 맹원들이 조직을 이탈하며 내분이 격화되었다. 당시 신중론의 입장에서 의견을 냈다. 1928년 4월 30일 동맹원들은 일부 인물들을 배제하고 새로운 결사체로 일우당(一友黨, 일명 일우동맹)을 조직하였다. 이때 일우당 조직에 가담하여 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비밀결사 활동은 1928년 하반기에 벌어진 대구고보 학생들의 동맹휴학으로 인하여 발각되었다. 대구고보 학생들은 연초에 14명의 학생이 퇴학당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 “일본인 교장과 교사 배척, 교우회 자치, 조선어 시간 연장, 조선 역사 과목 신설” 등을 내세우며 그 해 9월 26일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맹휴가 실패로 돌아가자 같은 해 10월에 다시 맹휴를 전개하였다. 그런데 일본 경찰이 맹휴에 가담한 학생의 집을 수색하던 중 비밀결사의 존재가 드러났다. 곧바로 검거 선풍이 불어 다른 동맹원들과 함께 붙잡혀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과에서 조사를 받았다. 1929년 8월 7일 예심이 종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재판 결과에 대해 검사가 불복하고 항소하여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풀려난 후 대구청년동맹에 관여하였다. 1931년 1월 22일 아침 대구경찰서 고등계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같은 해 1월 20일 대구 시내에서 「노동자에게 격함」이라는 격문이 발견된 것과 관련하여 다음날인 1월 21일 대구청년동맹 간부들과 중외일보 대구지국원이 체포되었는데, 이때 함께 붙잡혔다. 약 50일 동안 조사를 받은 후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같은 해 3월 12일 동지들과 함께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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