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해
朴允海1898 ~ 1937. 12. 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인사회당 적위군
- · 청년자강회
- ·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
- · 고려혁명군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한인사회당 적위군
- · 청년자강회
- ·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
- · 고려혁명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0) 1898년 함경북도 경성(鏡城)의 빈농 집안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박밀양(朴密陽)이며, 독립운동 과정에서 박윤해·박선달·김춘일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가족으로는 아내 올가 니키포로브나 김과 세 딸 지나이다·니나·류바가 있다. 1902년 부모님이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를 거쳐 니콜스크-우수리스크(Никольск-Уссуриский, 현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로 이주하였으며, 부모님을 찾아 1907년 러시아로 갔다. 1911년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있는 한인민족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로 가서 러시아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어로 시즌에는 막노동을 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여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풀려난 후 페테르부르크(Петербург, 현 상트페테르부르크[Сант-Петербург])로 이동하여 야지코프 사무실에서 잡일을 하며 경제 공부를 하였다. 러시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 원동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혁명운동에 참가하였다. 1918년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로 가서 반혁명투쟁 조사위원회에서 일하며,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전연방공산당(볼세비키) 하바롭스크 지역위원회 원동뷰로 산하에 한인분과를 조직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때 이동휘(李東輝)·김립(金立) 등과 함께하였다. 그 해 6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의 봉기가 일어나 연해주 일대가 백군(白軍)의 점령 아래 들어간 후, 우수리카자크 아타만атаман(대장)인 칼미코프(В.М.Кальмыков)가 일본군의 원조를 받아 북진하여 하바롭스크 공격에 착수하자 이만 전선에서 정치전권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 하바롭스크가 포위되자 ‘바론 코르프(코르프 남작)’호를 타고 블라고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로 피신하던 도중 백군에게 붙잡혀 하바롭스크로 되돌아왔다. 김 알렉산드라가 만들어준 위조 신분증 덕분에 풀려났다. 함께 풀려난 김립은 간도로, 유동열(柳東說)과 박애(朴愛)는 수찬 지구로, 다른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지만, 하바롭스크에 남아 한인들을 조직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하바롭스크에서 반(半)합법 청년조직인 청년자강회(靑年自强會)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다. 그 해 6월 6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민회 본부의 결사단(決死團)에서 사관후보생을 모집해 상하이(上海)로 파견하는 일에 대해 협의하였다. 상하이와 하바롭스크를 오가다가 1921년 1월 6일 극동공화국의 수도인 치타(Чита)에서 열린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 정기회의에서 이다물(李多物)과 함께 번역원으로 임명되었다. 극동국 한인부는 박애·계봉우(桂奉瑀)·김진(金震)·장도정(張道政)·박창은(朴昌殷) 등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동휘의 임시정부 국무총리 취임으로 중앙을 상하이로 이전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의 러시아 내 집행기관의 위상을 가졌다. 그 해 2월 말 박애, 최성우(崔聖禹)와 함께 극동국 한인부를 대표하여 자유대대 측과 군대 이동문제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특별한인군사협의회에 참여하였다. 이 협의회는 당대회와 군사대회 소집 문제를 둘러싸고 알력이 첨예화되는 위기 속에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두 그룹 바깥에서 양측의 충돌을 방지하려는 아래로부터의 중재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협의회가 극동부 한인부가 추진하고 있던 계획과 달리 진행되자 극동부 한인부로부터 소환 당하였다. 자유시사변 이후 이르쿠츠크(Иркутск)로 회군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이 1921년 10월 28일 이청천(李靑天)을 교장으로 사관학교를 설치하자 김명무와 함께 부관에 임명되었다. 그 해 12월 이르쿠츠크에 와서 고려혁명군의 극동 이동을 추진하던 이동휘는 친상해파 장교들을 규합하여 여단장 채영(蔡英), 참모장 이다물과 함께 군정위원으로 지도부를 교체 임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22년 1월 말 이동휘가 코민테른의 소환을 받아 모스크바로 떠난 후 3월 18일 이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두 고려공산당의 분쟁이 심해지자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의 주관으로 1922년 10월 19일 베르흐네우딘스크(Верхнеудинск, 현 울란우데[Улан-Удэ])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통합대회에 참가하였다. 1923년 5월 오게페우(ОГПУ, 통합국가정치보위부) 극동 전권대표부에 의해 일본 스파이 혐의로 고발된 이우련(李禹連)의 도주를 도와준 혐의로 붙잡혀 징역 4년을 받고 1925년 8월까지 2년간 치타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풀려난 후 치타의 증기기관차 수리공장에서 근무하였다. 1935년 11월 이르쿠츠크에 소재한 동시베리아 철도국 정치부 간부로 근무하던 중 내무인민위원부에 붙잡혔으며, 1937년 11월 14일 총살형을 받고 12월 8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상원⋮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